나무 외/춘양지역

첨성대연구

춘양목연구회 2012. 12. 23. 21:42

주 최 : 신라문화동인회

강연일시 : 2008. 6. 26() 오후 7:30 - 9:00

강연장소 : 경주문화원

강 연 자 : 경남대 신문방송학과 김영주

 

첨성대(瞻星臺) 연구 - 언론학적 관점에서

 

 

논문요약 :

 

고대중국 공론수렴제도의 하나인 영대’(靈臺)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첨성대의 기능을 새로운 공론권의 하나로 조망해 보는데 있다.

 

첨성대(瞻星臺)관측대'(관측시설), ‘제단’(祭壇), ‘상징기념물’, ‘불교건축물이라는 설 등 다양하게 존재.

필자의 주장 : “군주의 정치득실에 대해 하늘이 보내는 징후(천문)를 관찰하고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賢者 ; 處士)들에게 성변(星變)재이(災異)에 대한 대책을 묻는 장소[public sphere / 公論圈]를 가리키는 상징적 건축물"일 가능성 제기.

 

첨성대는 남자군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와 권력 장악력이 취약했던 선덕여왕이 중국의 고대공론제도의 하나인 영대지복’(靈臺之復)에서 영감을 얻어 신라의 현실정치에 구체화시킨 公論圈의 하나.

 

첨성대 구역은 일상적으로 천문관측을 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화평기에는 군주의 휴식공간(근처의 안압지 영역 포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재이(災異)나 성변(星變)의 발생시에는 군주가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사는 현자들에게 정치득실 및 재이대책을 물으면 그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장소로 상정된다.

 

 

주요 단어 : 첨성대, 公論圈, 고대 중국의 공론수렴제도, 영대(靈臺), 災異사상, 求言제도.

 

 

 

 

 

 

 

 

 

 

 

 

 

1. 서론

 

아래는 인터넷상에 일반적으로 나와 있는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설명이다.

 

국보 제31.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하고 있는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제위기간 : 632-647) 때에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조성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 곡선으로 쌓아 올려 그 위에 방형(方形)의 장대석(長臺石)을 두 겹으로 우물정자()와 같이 얹어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했다. 정남 방향을 향해 밑에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감실(龕室)과 같은 사각문(四角門)이 뚫려 있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첨성대의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석조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신라시대 희귀한 구조이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연은 三國遺事紀異 第一 善德王知幾三事에서 선덕여왕의 예지력과 통찰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장 마지막 단락에 첨성대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는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왕권중심의 유가적 통치이념에 입각한 김부식의 역사기술방법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 三國史記이외에도 舊三國史의 내용 가운데 神異한 사건을 중심으로 불교사관의 입장에서 인물중심으로 재구성하려고 애썼다(홍윤식, 1987, 113).

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 正史三國史記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연(A.D. 1206 - 1290)이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舊三國史別記에 나와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三國遺事에 전재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첨성대가 유교적 상징물이 아니라고 상정하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술하지 않았을 것이며, 일연은 불교적(무속적) 상징물로 보았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첨성대는 삼국유사이외에 高麗史, 世宗實錄지리지150, 新增東國輿地勝覽21 東覽24, 東京雜記1 古蹟, 明史朝鮮志 권상22, 增補文獻備考상위고 권2 및 여지고 권37, 경주 순창설씨 족보세헌편 등의 여러 가지 문헌들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신라 당대의 기록은 드문 편이다(나일성, 2000, 21 - 22).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첨성대는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 정관 7년 계사(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는 195, 위의 둘레가 216, 아래의 둘레가 35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기술하였다. 동경잡기에는 사람들이 그 속을 아래위로 드나들면서 천문을 관측했다고 하였으며, 경주 순창설씨 족보에는 설총은 항상 백구정에서 놀았는데 ... 이 대의 상층에 이름이 있는데 크게 쓴 세자는 공의 친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들은 첨성대가 신라 선덕여왕때 만들어져 고려와 조선을 거쳐오는 동안 커다란 구조변화 없이 그 때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현재 설총이 쓴 글씨가 남아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상층부의 일부는 변경가능성이 있다.

한편, 선덕여왕 때는 첨성대를 비롯하여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삼화령 애기부처상,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상 - 금동반가사유상, 남산 선방곡 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 추정 - 등이 대거 조성되었는데, 이것들은 다른 신라시대와 달리 고()신라의 독특하고 대표적인 문화유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은 선덕여왕과 첨성대 등에 대한 깊이 있는 기술이나 논의를 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미술사학자인 유흥준은 김부식을 비롯한 사관들이 여성을 폄하하는 유가적 전통아래 빠져있었기 때문에 여자인 선덕여왕과 그의 업적을 일부러 누락했을 것으로 보았다(1993, 140). 성리학을 국교로 삼은 조선시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첨성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해석은 학자와 전문가마다 매우 다양하다. 물리학자 남천우 교수를 비롯하여 미국 천문학자 루퍼스, 영국 과학사학자 니덤, 일본학자 와라 등 대부분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천문관측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만주몽골전공 사학자인 이용범 교수는 불교의 수미산을 연상케 하는 종교적 상징물, 수학자인 김용운 교수는 중국의 수학책인 주비산경(周髀算經)에서 얻은 천문지식을 통해 신라의 과학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간주하였다(유홍준, 1997, 359 - 360).

첨성대는 천문을 실제 관측하기에 매우 불편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 선덕여왕때 천문관측한 기록이 없다는 점, 동시대의 고구려 및 백제, 중국과 일본 등에 같은 모양의 첨성대가 없다는 점 때문에 천문관측대가 아니라는 주장이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다.

경주는 돌의 문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발달된 곳이다(최정호, 2004, 39-45). 석탑당간지주는 말할 것도 없고 첨성대를 비롯하여 석굴암, 포석정, 불국사의 석축(돌난간,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석빙고 등 독특하고 아름다운 석조문화를 자랑하고 있다.

첨성대의 전체모양은 다듬은 돌(소재는 화강암)로 조성한 유리병’(우물 또는 祭器 받침대라는 설도 있음)모양이다. 기본구조는 경주에 늘려있는 불교사원의 '석탑'을 원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불탑(佛塔)은 기본적으로 건물의 기초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部),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塔身部), 지붕에 해당되는 상륜부(相輪部)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첨성대 역시 2단으로 된 방형(方形)의 기단부, 27단으로 된 원통형(圓筒形)의 본체부, 2단으로 된 정자형(井字形)의 정상부 등 3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대 중국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설에 입각하여 첨성대의 기단부는 땅을 상징하는 방형(方形)이며, 본체부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圓形)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한국과학사 전공의 박성래교수본체부의 27단과 정상부의 정자석((井字石)을 합쳐 28단이 되는데, 이것은 기본 별자리 28(宿)를 상징하고, 여기에 기단석 2단을 합쳐 29가 되는데, 이것은 음력으로 1달의 길이가 된다. 본체부의 구자석(口字石) 아래의 12단과 위의 12단을 합친 2424절기를 상징하고, 121년을 상징한다. 사용된 돌의 개수 362개는 1년의 날수가 된다고 주장하였다(1990, 433). 관련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한편, 동일한 전공의 전상운교수에 따르면, “정자석(井字石)은 동서남북 4방위와 중간의 4방위 등 8방위에 맞추었으며, 정남을 향하고 있는 구자석(口字石)은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 측정의 역할을 한다”(1975, 54), 지구과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선덕여왕 시절에 조성된 첨성대는 삼국 가운데 신라 유일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 비록 모양은 다를지라도 당시 문화가 앞선 고구려나 백제, 다음 왕조인 고려에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첨성대가 있었다(나일성, 2000, 17 - 34).

필자는 첨성대와 그 기능과 역할이 유사한 고대중국 공론수렴제도의 하나인 영대’(靈臺)에 주목하였다. 이 논문은 자료가 별로 없는 첨성대에 대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영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 기능을 유추해 보고, 재이사상과의 연관성을 통해 새로운 공론권으로서 가능성을 조명해 보는데 목적이 있다.

 

2. 중국의 다양한 공론수렴제도

 

중국고전에 나오는 공론수렴제도는 비방지목(誹謗之木)을 비롯하여 진선지정(進善之旌), 감간지고(敢諫之鼓), 명대지의(明臺之議), 총가지정(總街之庭), 영대지복(靈臺之復), 사직지인(司直之人), 계신지도(戒愼之鞀) 등 다양하다.

중국학자 팽발공비(彭勃龔飛)에 따르면, “백성들의 공론을 통한 감독(民衆公論監督)은 원시공동사회에서 민주적 권리의 최초형식이 되었으며, 전체 씨족사회의 공인된 영웅일 뿐만 아니라 씨족성원들의 사회공복으로서 인민에 대한 특권이 없었던 그 당시 부족연맹수령(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로 堯舜禹 등이 있었음)들은 각자 나름대로 백성들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제도를 설치하였다”(1989, 13-15)는 것이다.

이들은 그 사례로서 管子환공문편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제환공이 관자에게 있는 것을 잃지 않고 얻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떤 방법이 있는가?’ 라고 묻자, 관자는 사사로운 호오(好惡) 때문에 공정을 해치지 말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살펴서 스스로 경계를 삼으라고 하면서, ‘황제(黃帝)는 명대지의(明臺之議)를 설립하여 위에 있는 현명한 자로부터 (정치득실을) 살폈고, ()임금 때는 구실지문(衢室之問)이 있어서 아래에 있는 많은 백성들로부터 의견을 들었으며, ()임금 때는 고선지정(告善之旌)이 있어서 임금이 은폐된 바가 없었고, ()임금은 감간지고(敢諫之鼓 ; 본문은 諫鼓於朝)를 세웠는데 꾸짖어 간하는 설비를 갖추었으며, ()임금은 총가지정(總街之庭)을 두어서 임금의 잘못에 대해 비방하는 백성의 말을 관찰하였으며, 무왕(武王)은 영대지복(靈臺之復)을 두어서 현자가 할 말을 진술하게 하였다. 이런 까닭에 옛날의 성군들은 있는 것을 잃지 않고 얻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환공이 내가 힘써 그렇게 하고자 한다. 그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묻자, ‘책실지의(嘖室之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공론수렴제도의 명칭은 管子이외에도 한나라 초기(BC 120년경)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찬술한 淮南子와 송나라 경덕(景德) 2(1005)에 왕흠약(王欽若) 등이 찬술한 冊府元龜에 나온다. 淮南子主術訓 下탕임금은 사직지인(司直之人)을 두었으며, 무왕은 계신지도(戒愼之鞀)를 세웠다. 이것들은 (군주에게) 만약 허물이 조금이라도 있게 되면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으며, 冊府元龜諫諍部 總序우임금 때는 오성지청(五聲之聽)이 있었으며, ()임금 때는 호문지고(好問之誥)가 있었으며, 무왕 때는 대도지방(大道之訪)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중국고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공론수렴제도는 비방지목(誹謗之木)과 진선지정(進善之旌), 감간지고(敢諫之鼓) 3가지로서, 이 가운데 2가지 또는 3가지를 짝으로 인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비방지목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로 한가운데에 목패를 세우고 그 위에 각종 고시(告示)나 정치득실에 관한 평어(評語)를 써넣도록 한 제도이며, ‘진선지정사람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 깃대를 세워놓고 그 아래에 서서 할 말을 올리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이에 비해, 감간지고궁궐 안에 북을 설치해 놓고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북을 쳐서 간쟁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김영주, 1992, 317-318). 비방지목은 글을 알아야 사용할 수

 

 

<> 중국의 공론수렴제도의 종류

 

공론수렴제도

종류

 

 

出 典

管子

冊府

元龜

漢書

淮南子

史記

綱鑑

新書

三國志

後漢書

1. 誹謗之木

 

 

 

 

未詳

 

堯舜

2. 進善之旌

 

 

未詳

 

未詳

 

 

 

 

 

 

未詳

 

堯舜

4. 明臺之議

 

黃帝

黃帝

 

 

 

 

 

黃帝

 

5. 衢室之問

 

 

 

 

 

 

 

6. 總街之庭

 

 

 

 

 

 

 

 

 

7. 靈臺之復

 

武王

 

 

 

 

 

 

 

 

8. 嘖室之議

 

桓公

 

 

 

 

 

 

 

 

9. 五聲之聽

 

 

 

 

 

 

 

 

 

10. 好問之誥

 

 

 

 

 

 

 

 

 

11. 大道之訪

 

 

武王

 

 

 

 

 

 

 

12. 司直之人

 

 

 

 

 

 

 

 

 

13. 戒愼之鞀

 

 

 

 

武王

 

 

 

 

 

 

 

공론수렴제도

종류

 

 

出 典

管子

冊府

元龜

漢書

淮南子

史記

綱鑑

新書

三國志

後漢書

1. 誹謗之木

 

 

 

 

未詳

 

堯舜

2. 進善之旌

 

 

未詳

 

未詳

 

 

3. 敢諫之鼓

 

 

 

未詳

 

堯舜

4. 明臺之議

 

黃帝

黃帝

 

 

 

 

 

黃帝

 

5. 衢室之問

 

 

 

 

 

 

 

6. 總街之庭

 

 

 

 

 

 

 

 

 

7. 靈臺之復

 

武王

 

 

 

 

 

 

 

 

8. 嘖室之議

 

桓公

 

 

 

 

 

 

 

 

9. 五聲之聽

 

 

 

 

 

 

 

 

 

10. 好問之誥

 

 

 

 

 

 

 

 

 

11. 大道之訪

 

 

武王

 

 

 

 

 

 

 

12. 司直之人

 

 

 

 

 

 

 

 

 

13. 戒愼之鞀

 

 

 

 

武王

 

 

 

 

 

 

있었으며 감간지고는 궁궐 가까이 접근해야 비로소 할 말을 진술할 수 있으므로 일반백성들의 접근권이 약간 제약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진선지정은 일반백성들이 이용하는데 비교적 편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함께, 구실(衢室)이나 총가(總街)에 나오는 자와 자는 사통팔달의 도로를 의미(中文大辭典第八卷 衢條 ; 纂詁, 四通道也)하여 구실지문(衢室之問)과 총가지정(總街之庭)은 오선지청(五聲之聽)이나 대도지방(大道之訪)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왕래가 잦고 사통팔달의 장소에 설치한 것으로 짐작되어, 아래에 있는 일반 백성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제도로 보인다. 반면, 명대(明臺), 영대(靈臺), 책실(嘖室) 등은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明政敎之堂’(周禮考工記 匠人)을 지칭하여, ‘현자(賢者)들의 의견을 청취할 목적으로 궁궐 안이나 궁궐 근처에 설치한 공론수렴공간(管子환공문편, “黃帝立明臺之議者, 上觀於賢也 ... 武王有靈臺之復, 而賢者進也 ... 桓公曰, 吾欲效而爲之, 其名之云何, 對曰, 名曰嘖室之議)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명대지의, 영대지복, 책실지의 등은 현자'(賢者 ; 處士 / 덕행이 있고 지혜가 많지만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中文大辭典八卷, 賢者條)들의 공론수렴제도인 점으로 볼 때, 일반 백성보다 선비계급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제도로 보인다. 전자가 일반 백성들의 공통된 의향인 민정(民情)을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하의상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후자는 벼슬살이하지 않고 은둔하는 선비들이 형성한 공론을 쌍방적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군주와 토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직지인(司直之人)공정정대한 사직관(判官)을 두고 그로 하여금 법에 입각하여 군주의 허물을 간쟁토록 한 제도를 말하고, 계신지도(戒愼之鞀)북의 일종인 땡땡이를 설치하여 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울려서 군주를 경계케 하는 제도를 말한다(菊池晩香, 淮南子國字解漢籍國字解全書 第四十三卷).

고대중국의 문헌에 나와 있는 공론수렴제도 가운데 비방지목(誹謗之木)과 진선지정(進善之旌), 감간지고(敢諫之鼓) 3가지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줄기차게 나오고 있는 반면, 구실지문(衢室之問)과 오성지청(五聲之聽), 계신지도(戒愼之鞀) 등은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영대지복(靈臺之復) 역시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어 중요한 공론수렴제도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한무제(漢武帝 ; 제위 B.C. 141 - B.C. 87)明堂제도를 부활하면서 삼궁(辟雍, 明堂, 靈臺)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명당(明堂)고대 행정의 중심으로서, 시교(施敎), 청정(聽政), 제사(祭祀) 3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王治心, 1988, 54 - 60). , 광의의 명당에는 교육기관(학교)인 벽옹(辟雍), 여론청취기관인 협의의 명당(明堂), 제사기관(사당)인 영대(靈臺) 등이 동시에 설치되었는데, 이때 영대는 제사지내는 사당이 되었다. 영대가 '원래 농업신에게 제사지내던 제단이었다는 서울대 문중양 교수의 주장(2006, 85)은 제고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고대부터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하였던 공론수렴제도들을 진한시대 이후부터 실천적 차원에서 변용하여 현실정치에 구체화시켜 나갔다. 예컨대, 사직지인(司直之人)은 진한(秦漢)시대부터 감찰제도(監察制度), 감간지고(敢諫之鼓)의 승문고제도(升聞鼓制度), 명대지의(明臺之議), 책실지의(嘖室之議) 등은 집의제도(集議制度)로 구체화되었다. 이 외에도 중국은 공론수렴장치로서 상소제도, 구언제도, 경연제도, 저보제도(邸報制度) 등을 다양하게 설치, 운영하였다(朱傳譽, 1984).

조선도 예외 없이 초기부터 중국고전에 나오는 다양한 공론수렴제도들이 공론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본 전제라고 인식하여 고려시대부터 뿌리를 내렸던 공론수렴제도를 도입하는 한편으로 중국에 존재하였던 유관제도를 참조하여 새롭게 설치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고려왕조 때 이미 설치되어 있었던 상소제도(上疏制度), 구언제도(求言制度), 대간제도(臺諫制度), 경연제도(經筵制度), 관상감제도(觀象監制度) 등은 그대로 도입하는 한편,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 ; 조선왕조 태종 때 설치), 조보제도(朝報制度 ; 중종 때 정착) 등은 새롭게 도입하였다.

 

3. 영대지복(靈臺之復)과 첨성대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공론수렴제도 가운데 영대지복(靈臺之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영대지복(靈臺之復)첨성대와 유사한 기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중양 교수도 첨성대와 영대(靈臺)와의 유사성에 주목한 바 있다(2006, 31, 85).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영대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나오지 않으며,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몇 차례 언급되어 있으나(高麗史世家29 충렬왕 7; 30 백관 서운관 ; 1 천문 성변 현종) 전모를 파악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대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풍부하다. 태종실록11625일조에 영대가 처음 언급된 이래로 태종 17, 세종 11, 문종 1, 연산 11, 중종 12, 명종 8, 인조21년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조선시대 영대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태종 11625: 처음에 태조가 공신들의 초상을 장생전(長生殿)에 그려두게 하고, 또 어진을 이곳에 봉안하게 하였다. ... 예조에서 상언하기를, “오직 주나라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안은 그림을 그렸을 뿐이고, 한나라 영대(靈臺)와 당나라 능연각(凌烟閣)은 공신만을 그렸을 뿐이며 어진을 봉안한 예는 없었습니다

태종 1795: 관천대(觀天臺)를 쌓으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서운관(書雲觀)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예전에 천자는 영대가 있어 천문을 측후하였고 제후는 시대(時臺)가 있어 사시를 측후하고 요사한 기운을 관측하였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따라 대를 쌓아 천문을 측후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마침내 시행하지 아니하였다.

세종 111022: 상참(常參)을 받고, 경연에 나아가서 詩經을 강하는데 영대편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영대를 만든 것은 비록 요기(妖氣)를 관망하여 재앙과 상서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 하나, 때때로 구경하고 놀면서 노일(勞佚)을 조절하였다. ... 한나라로 내려와서는 원유(苑囿)를 숭상하였으며, 원제(元帝) 때는 더욱 심하였다. 또 짐승을 싸움시키는 놀이를 하게 하여 구경하는 등 그 말류의 폐가 이와 같은데 이르렀으니, 문왕(文王)이 영대를 만든 것이 어찌 특별히 일장일이(一張一弛)하기 위하였을 뿐이었겠는가하니, 참찬관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영대를 만든 것은 요기를 관망하고 재앙과 상서를 살피는 것이 본래의 취지였으나, 때때로 거기서 구경하고 놀면서 노일(勞佚)을 조절하는 것도 또한 성인의 일장일이(一張一弛)의 도입니다하매, 임금이 그렇도다하였다.

문종 11126: 윤대(輪對)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孟子를 강하다가 문왕(文王)이 영대를 짓기 시작하였다는 문장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의 못은 항상 새와 짐승을 기르던 곳이었는가?” 하니 시강관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국가에 대()가 있는 것은 분침(氛祲 ; 재앙을 초래하는 요기)을 바라보며 재상(災祥)을 살피려는 이유에서입니다. () 밑에 동산이 있고 동산 속에 못이 있는데, 못은 항시 새나 짐승을 기르던 곳이 아니었습니다고 하였다.

연산군 11326: 전교하기를, “기를 펴고 유람하는 것은 때때로 하지 않을 수 없거늘, 바깥 사람들이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서 유희라고 지목하지나 않은가? 예로부터 제왕으로 어찌 태평한 때라면 사시의 절기를 따라 기를 펴고 유람한 이가 없으랴! 정원(政院)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영대가 때로 유람하여 노고와 안일을 조절하고 기를 펴는 일을 하던 곳이고 보면, 문왕(文王)도 일찍이 행하였는데, 바깥 사람들이 어찌 감히 유희라 하리까?” 하였다.

중종 121125: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 참찬관 성세창이 아뢰기를, “주나라 때에는 영대를 쌓아 천문을 우러러 보고 재앙을 굽어 살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관상감(觀象監)을 설치한 까닭은 이를 위해서일 터인데, 하는 일이 지극히 소완하여 크게 본의에 어그러지며, 관상감의 관원 중에는 오성이 운행하는 도수를 잘 아는 자가 드무니, 어떻게 감히 천문을 살펴 인사를 살피겠습니까?”

근일 목성(木星)이 태미원을 범하고 달이 또 태미원을 범하였는데, 이것은 성세(盛世)에 있어서는 안 될 재변입니다. 관상감의 일은 정승이 맡아 다스리니 중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일을 중하게 여겨서 유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종조는 치도(治道)가 지극히 갖추어졌는데, 간의대(簡儀臺) 같은 것을 다 그 때에 세운 까닭은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는 도리가 지극히 크고도 급하기 때문이었으니, 이제 대신을 가려서 특별히 가르쳐야 합니다. ...“ 하니, ()이 이르기를, ”천문의 일은 지극히 크다. 관상감의 관원이 무슨 아는 것이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잘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젊은 문신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다

인조 21228: 사간(司諫) 김익희가 상소하여 ... 아울러 시사(時事)를 진술하기를, “근래에 天心이 편치 않아 매서운 경계가 몰립니다. 별의 재앙과 무지개의 변괴가 매일 발생하다시피 하며 기타 일식, 먼지바람, 누런 안개, 흙비 등의 이변이 청대(淸臺 ; 영대의 이칭)가 보고하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천도는 심오하니 비록 어떤 일의 감응(感應)이라고는 지적할 수 없지만 쇠퇴할 대로 쇠퇴한 나라의 형세에 어느 일엔들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

일찍이 듣건대, 주자(朱子)의 말씀에, ‘이번에 이 재이(災異)가 일어난 것에 대해 지난 일을 추적하여 깊이 알아볼까 합니다. 혹시 덕이 높은 자가 이르지 않아 정사 중에 큰일을 거행하지 못하는가, 바르고 진실된 말은 듣지 못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은가, 덕의(德義)의 풍속은 드러나지 않고 더럽고 천한 자가 날뛰는가, 군자는 쓰지 못하고 소인은 버리지 못하는가, 대신은 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임금의 측근이 권세를 휘두르는가, 상과 벼슬을 쉽게 내리고 위엄과 벌을 아니 내리는가,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고 은택이 백성에게까지 아니 미치는가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이 몇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은 뒤에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보여 견고(譴告)하는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상 몇 가지를 유념하시어 자세를 고치소서하였는데, ()이 가납하였다.

순조 4925: 주강(晝講)하여 詩傳영대장(靈臺章)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영대란 것을 신령이 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과장한 것 같다. 문왕(文王)이 이름을 붙인 것인가, 백성들이 이름을 붙인 것인가?” 하니, 시독관 임후상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 대()를 일러 영대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과장으로 자랑하는데 가깝다. 백성들이 비록 이름을 붙였다 하더라도 문왕이 어찌 그대로 썼겠는가?” 하니, 각신(閣臣) 이만수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라 이르고 후세에 그것을 전했으나, 문왕의 시대에 반드시 이 대의 이름이 있었는지는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영대에 대한 조선시대의 인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거(典據) : 詩經大雅, 靈臺 箋

설치자 : 주나라 문왕(管子에는 문왕의 아들인 무왕이라 함)

설치이유 : 천문관찰을 통해 재이(災異)와 상서(祥瑞)를 살핌. 재이가 없을 때 주위에 동산과 못을 꾸며 휴식을 취함

후대의 유사 기관 및 시설 : a)서운관(書雲觀), 관상감(觀象監) - 담당관청

b)관천대(觀天臺 ; 설치 못함), 간의대(簡儀臺) - 관측시설

재이의 종류 : 별의 재앙(彗星), 무지개의 변괴, 일식, 먼지바람, 누런 안개, 흙비(土雨)

재이의 정의 : 자연이변(災異)을 통해 군주의 정치실책에 대한 '하늘의 꾸짖음'(天譴)

영대의 명칭 : 청대(淸臺 ; 周代는 다른 명칭으로 호칭 가능성 시사)

군주의 실책 :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배 가까이 하기, 진실한 말 듣지 않고 아첨자의 말 듣기, 천한 자나 임금측근들이 날뛰는 것 방조하기, 상벌 일관성 없게 내리기, 뇌물수수하기, 군주은택 편파적으로 베풀기

 

이처럼 조선왕조는 영대(靈臺)’가 자연의 이변인 재이(災異)를 관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재이가 없을 때나 상서로운 일이 있을 때는 임금이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피로를 푸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이학박사 ; 한국과학사 전공)는 신라의 첨성대를 영대와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영대는 천문시설을 통해 천문을 관측하고(천문대의 기능), 토속적인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사당의 기능) 아름다운 숲을 조성하여 휴식공간(공원의 기능)으로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첨성대를 '염원을 풀기 위한 일종의 제단'으로 정리하였다(2006, 27-32, 85).

三國史記雜志 第一 祭祀 樂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다양한 대상들(농업과 관련되는 자연신, 일월성신, 조상신, )에게 특정한 장소(종묘, 사직단, 삼산오악, 명산대천, 성문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제사(大祀, 中祀, 小祀 )를 봉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일월성신과 관련되는 제사는 3가지임을 알 수 있는데, 일월제’(日月祭)는 문열림(文熱林)에서, 농업신인 영성(靈星)에게 제사지내는 영성제(靈星祭)는 본피부(本彼部) 유촌(遊村)에서, 오성제(五星祭)선덕여왕이 즉위 원년에 설립한 영묘사(靈廟寺)에서 지냈다'고 기술하였다.

박성래 교수영성제를 지냈던 '본피부 유촌'을 첨성대가 있던 곳으로 상정하였다(박중양, 2006, 31). 그러나, 三國遺事卷第一 紀異第一 新羅始祖 赫居世王條에 따르면, 본피부(本彼部)는 황룡사 남쪽 미탄사(현재 경주시 보문동 소재 낭산의 서쪽)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 중심부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조양동, 입실, 모화 일대로 상정되는 곳이다. 오히려 첨성대는 경주의 중심부에 있었던 양산부(陽山部 ; 及梁部와 동일)에 위치하고 있다(이종욱, 2004).

영성제(靈星祭)는 경주의 진산(주산으로 보기도 함)이며 신라인들이 신령스럽다고 여겼던 낭상(狼山)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성제(五星祭)를 지낸 영묘사(永廟寺)의 위치는 지금의 흥륜사 자리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寺名이 적힌 명문기와 몇 편이 발굴되면서 흥륜사와 700m 떨어진 곳(보문동 소재)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첨성대(인왕동 소재)가 제사지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주장은 위치가 서로 맞지 않아 논리상 모순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대를 조선왕조 때 실제로 설치되었던 서운관(書雲觀)이나 관상감(觀象監)과 동일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있었던 서운관(세종 7<1425> 이후 觀象監, 연산조때 司曆署, 중종 이후 書雲觀으로 환원)천문(天文), 역수(曆數-책력),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일을 관장한 관청이었다.

이 관청은 고려 초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현종 14(1023) 태복감(太卜監)을 사천대(司天臺), 예종 11(1116) 사천감(司天監)으로 다시 고쳤다. 충렬왕 원년(1275) 관후서(觀候署)로 하였다가 뒤에 사천감(司天監)으로 환원하였으며, 충렬왕 34(1308) 태사국(太史局)을 병합하여 서운관(書雲觀)으로 개칭하였다. 공민왕 5(1356) 사천감(司天監)과 태사국(太史局)으로 분리하였으나, 11(1362)에 다시 병합하여 서운관(書雲觀)으로 하였으며, 18(1369)에 분리, 21(1372)에 통합하였다. 이처럼 서운관은 관청명의 변경과 기관의 통합 및 분리가 자주 이루어졌다. 한편, 고려시대 태사국(太史局)의 속관(屬官)으로 영대랑’(靈臺郞)이라는 하급관리(8)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부터 이미 첨성대를 영대와 연결시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 志三十, 白官, 書雲觀條).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제도들은 그 당시 선진국으로 여겨졌던 중국의 제도들을 참조하여 토착화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중국에서 천문관측을 담당한 관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였는가?

주나라 춘추시대태사(太史)를 두어 천자가 제후나 경대부에게 수여하는 사령장 문서를 기초케 하고 역사기록과 함께 사서 및 국가 전적의 편찬, 천문역법제사 등을 관장케 하였다. 진한(秦漢)태사령(太史令)을 설치하여 천상(天象)과 역법(曆法)을 관장케 하였는데 그 직위는 점차 낮아졌다. 위진(魏晉) 이후 역사관련 직무가 저작랑(著作郞)으로 귀속되자 태사(太史)는 역법(曆法)의 추산만을 담당하였다. 천문관장기관은 수나라 태사감(太史監)으로, 당나라 초태사국(太史局)으로, 당 숙종때부터 五代까지 사천대(司天臺)로 변경되었다. 송나라태사국, 사천감(司天監), 천문원(天文院)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요나라사천감, 금나라사천대로 호칭하였다. 원나라때는 태사원(太史院)과 사천감(司天監)으로 분리하여 역법추산의 일은 태사원에 귀속시키고 사천감은 빈이름만 남았다. 명나라와 청나라는 모두 흠천감(欽天監)으로 호칭하였다(徐師中. 1984, 19, 84).

한국과 중국 양국은 왕조와 군주에 따라 비록 다양한 관청명을 사용하였지만, 천문을 관측하는 일은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중국2천 수백년 전부터 천문을 관측하는 전문 기관과 관리들이 존재하였는데,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만의 중화학술원에서 편찬한 中文大辭典(全十卷)에 따르면, 靈臺는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인 문공(文公 ; 나중에 文王의 시호를 받음)이 설치한 대인데, 중국고대의 천자들은 일종의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영대’(靈臺)를 설치하여 천문기상의 변화(災異祥瑞)를 관찰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주나라 이후의 고대 통치자들도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대를 설치하였는데, ()의 영대는 처음에 청대(淸臺)라고 하였으나 음양과 천문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한 기능에 걸맞게 영대(靈臺)로 명칭을 변경하였다(三輔黃圖).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천문관측은 고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국가 성립이전은 물론이고 고대국가의 성립기인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농업을 국가경제산업의 근간으로 삼은 농업국가에서는 필수적이었다.

고구려(B.C. 37 - A.D. 668)의 유적 가운데 무용총과 각저총의 무덤천장에는 많은 별자리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15세기에 편찬된 세종대왕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평양성 안에 첨성대의 유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 시대에는 천문관측을 위한 천문대가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B.C.18 - A.D.660) 역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일관(日官)을 두고, 천체의 운행과 시간을 측정하였다. 6세기에는 누각박사, 역박사, 일관 등의 관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가운데 천문분야가 가장 늦게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신라(B.C.57 - A.D.935)는 선덕여왕(제위기간 : 632-647) 때에 첨성대를 세웠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천문대 유적 가운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의 정사기록인 三國史記에는 이 시기에 발생하였던 일식월식 현상, 오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행에 관한 관측기록(예컨대, 오성입월, 월범오성, 오성능범, 태백주현), 혜성신성유성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 당시 신라인들은 중국 유가(儒家)의 유심적 재이관(唯心的 災異觀 ; 천인감응사상과 동일)에 입각하여, ‘하늘()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천기의 변화와 자연의 이변을 통해 군주의 정치득실에 대해 견책한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천기의 변화와 자연의 이변에 관한 기록은 군주의 비행이나 허물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고 인식하여 사서에 빠뜨릴 수가 없었다. , 이러한 기록들은 성변(星變)과 재이(災異)를 국가존망이나 위정자의 안위와 관련지어 인식함으로써 천문학적 관점보다 정치학적 관점으로 활용한 측면이 오히려 더 강했다.

 

4. 재이사상(災異思想)과 구언제도(求言制度)

 

자연재해또는 범상하지 않은 자연현상으로 풀이되는 災異는 인간사(人間事)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사상가에 따라 인간행위와 관련하여 발생한다고 간주한다. 그런 까닭에, ‘천도를 밝히는 것’(易經) 또는 오복육극(五福六極 ; 길흉)의 징조’(尙書)라고 생각했는가 하면, ‘천지의 훈계’(漢書宣帝紀)라고 인식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春秋를 편찬하면서 인사(人事)와 재이(災異)를 관련시켜 개수하였다(閻沁恒, 1960, 41).

인사(人事)와 재이(災異)를 관련시키는 사상, 무왕 13(기원전 20세기경)의 기사로 전해지는 尙書洪範篇에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최근의 고증에 따르면 홍범편이 기원전 4 - 3세기인 전국시대 음양오행가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이것은 재이인사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은 제자백가 가운데 주로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홍범편(洪範篇)에 따르면, “여덟째는 여러 징후(庶徵)들이다. 이것은 비 볕 더위 추위 바람 계절로서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고르면 풀들이 무성해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너무 많거나 적어도 흉한다. 다음과 같은 것은 좋은 징후(休徵)들이다. 군주가 엄숙하면 때맞게 비가 오고 잘 다스리면 때맞게 날이 개인다. ... 좋지 못한 징후(咎徵)로는 통치자가 상궤를 벗어나면 궂은 비가 오래 계속되고 횡포하면 가뭄이 계속되고 안락만 누리면 더위가 계속되며, 조급하게 처리하면 추위가 계속되고 도리를 분별 못하면 바람만 계속된다고 하여, 통치자의 잘못된 통치행위는 자연의 이변을 초래한다고 소박하게 인식하였다. 한편, 기본골격만을 제시한 홍범’(洪範)과는 달리 군주의 탈규범적 행위에 따른 재이 행태를 월별로 상세하게 기술한 월령'(月令) - 기원전 3세기경의 저술로 알려진 呂氏春秋, 禮記月令篇 - 이 존재한다.

법가들의 강압적인 통치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무력으로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왕조는 나라를 세운 지 겨우 15년 만에 한왕조에 나라를 물려주게 되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정치적 통일사상을 물려받고 미결의 과업인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수립하는 일을 추진하게 된다. 개국 초기부터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작업에 크게 기여한 사상가는 동중서(董仲舒 ; 한무제 때 학자 / B.C. 179 - 104)였다.

동중서는 그의 저서 春秋繁露를 통해, ‘인간을 의 일부로 보면서 인간행위의 정당화는 의 운행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음양가에서 출발한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주로 유교적 정치철학과 연결시킨 그는 천지의 불변원리는 음양의 교차이며 양()은 하늘의 덕()인 반면, ()은 하늘의 형()이다. 이것은 하늘이 양을 믿고 음을 믿지 않으며 덕을 좋아하고 형을 싫어하기 때문”(春秋繁露陰陽義)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하늘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는 까닭에, 하늘과 사람은 서로 하나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사상(天人感應思想)을 천명한 것이다. , 통치자의 그릇된 행위가 하늘을 노하게 하면 하늘의 진노는 비정상적 자연현상(지진, 일식, 월식, 한발, 홍수 등)으로 표현된다고 목적론적으로 해석하였다.

음양의 원리를 근거로 천인감응사상을 나름대로 체계화시킨 동중서는, 재이(災異)란 천지만물에 있어 범상하지 않은 변화(不常之變)를 뜻한다. 그 가운데 작은 것을 재변()이라 하는데, 이것이 먼저 일어난 후에 이변()이 잇따라 일어난다. 재변은 하늘의 꾸짖음(天之譴)이며, 이변은 하늘의 위협(天之威)이다. 꾸짖는데도 재변의 뜻을 알지 못하면 괴이한 이변을 보여서 놀라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두려움과 공구함을 알지 못하면 그 위태로움과 재앙은 극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하늘은 군주를 사랑하는 뜻을 보이면 군주 자신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春秋繁露必仁且智)고 인식하였다.

이처럼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고대중국 사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상주(商周) 이래로 특히 공맹학설의 관점은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 입장을 견지, ‘’()의지적 존재로 파악하여 자연 특히 재이(災異)’어떤 결정된 목적과 결부되어 생성,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의 사상가들이 이러한 사상적 경향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전국시대의 순자(荀子)와 전한시대의 왕충(王充)은 유심론적 재이론에 반대하고, 유물론적 재이론을 지지한 대표적 사상가였다(荀子天道論 ; 論衡物勢論).

한편, 중국고대의 신민(臣民)들은 최고통치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위적 의사결정과정에 자연스럽게 의견을 투입하기 위해 재이를 빙자하였는데 통상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사건처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장치 재이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떤 재이가 발생한 이후에 시정의 폐단을 감지하여 그것을 고치도록 진언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閻沁恒, 1960, 41).

재이가 발생하면 중국고대의 대부분 군주들은 대체로 자신의 정치행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견책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군주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힘써 노력하면서, 현량(賢良)을 천거하도록 칙서를 내리는 동시에 하정상달을 구비케 하며 상민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錢穆, 1984, 39).

前漢書後漢書帝紀篇현량(賢良)을 뽑아 올려라는 조칙이 43건이었는데, 그 가운데 30건이 재이가 발생했을 때 반포한 것을 보면, ‘재이가 언로(言路)를 열어주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차배근, 1984, 67). 한대에 성행한 재이사상(災異思想)은 그 당시 군신간 반드시 지켜야 할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극언지사(極言之士)들이 제재(除災)의 일환으로 군주의 정치득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천재지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군주가 자책하고 신하들의 직언을 듣는 것은 천인감응사상(災異思想은 이칭)에 있어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것인데, 이것은 書經洪範篇의 오사(五事)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고 신민을 통솔하는 5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홍범(洪範) 오사(五事)에 따르면, “첫째 태도()이며, 둘째 말씀()이며, 셋째 보는 것()이며 넷째 듣는 것()이며, 다섯째 생각함()이다. 태도는 공손하여야 하고() 말씀은 올바른 것을 따라야 하며()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똑똑하여야 하며() 생각은 치밀해야 한다(). 공손하면 엄숙해지고() 올바른 것을 따르면 잘 다스려지며(), 맑게 보면 명철해지고() 똑똑히 들을 수 있으면 지모가 있게 되며(), 생각이 치밀하면 곧 환히 통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군주가 유가의 이상적 인간상인 성인’(聖人)이 되려면, ‘()로 많이 듣고(多聞) ()으로 많이 물어서(多詢) 총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중국의 사상적 영향아래 있었던 까닭에 재이발생에 대한 대책은 중국의 전형적인 유가대책을 비롯하여 불가 및 도가 대책 등 다각적으로 마련되었다. 의식적 대책으로는 유가적(儒家的) 입장에서 군주 스스로 책기수선(責己修善 ; 減膳撤懸의 형식으로 나타남)하였으며, 구일월식의(求日月食儀) 등 예전(禮典)의 실시, 불가적(佛家的) 입장에서 제재(祭齋) 거행, 불경독송 및 강경(講經)의 실시, 도가적(道家的) 입장에서 초재(醮齋), 무속적(巫俗的) 입장에서 산천 제사 등을 시행하였으며, 현실적 대책으로는 구언교지(求言敎旨) 하달, 죄인에 대한 사면실시, 현량(賢良)의 기용, 가중한 공역의 중지, 부당한 인사처리의 시정 등 구체적인 재이대책을 실시하였다(이회덕, 1984, 84 - 85). 삼국시대(신라)에도 재이’(: 혜성이 왕궁의 동루 남쪽으로 떨어짐)가 발생하자 왕이 대사면을 실시하고 몸을 닦고 반성하였다는 기록(三國遺事惠恭王條)이 나온다.

유가의 전형적 대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는 공론을 모으기 위해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리는 것이다. 고려시대 군주가 천재지변을 당해 그 대책으로 신하들의 직언을 요청하는 구언(求言)의 사례高麗史節要高麗史에 수많이 보인다. 그 한 예로, 목종 6(1003) 2월 재이가 발생하자 경관(京官) 5품 이상은 봉사(封事)로 의견을 개진하라는 구언교지를 내린 바 있다(高麗史節要현종 즉위년(1009) 6월 문관 상참관 이상 ; 문종 6(1052) 5월 상참관 이상과 구신(舊臣) ; 의종 16(1162) 문무관 4품 이상).

 

5. 공론권(公論圈)으로서의 첨성대 - 새로운 해석 가능성

 

삼국시대에는 언론이나 여론과 관련되는 용어, 재이를 빙자한 언론행위, 유가적 언론사상, 언론제도 등이 존재하였는가?

 

①『三國史記권 제9 신라본기 제9 경덕왕 15(756) : 2월 상대등 김사인이 근년에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났으므로 왕에게 글을 올려 시국 정치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극론하니 왕이 이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春二月 上大等金思仁 以比年災異屢見 上疏極論時政得失 王嘉納之”).

②『三國史記권 제9 신라본기 제9 혜공왕 16(780) : 봄 정월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다니며 노는 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하였다.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서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여름 4...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春正月 黃霧 二月 雨土 王幼少卽位 及壯淫于聲色 巡遊不度 綱紀紊亂 災異屢見 人心反側 社稷杌隉. 伊金志貞叛 聚衆 圍犯宮闕 夏四月 ... 王與后妃爲亂兵所害”).

의 자료들은 재이(災異)가 일어났을 때 군주의 2가지 형태를 예시한 것이다. 전자는 왕의 정치득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경우이며, 후자는 재이에 대한 대책이 없자 난이 일어나서 군주가 피살된 경우이다.

 

③『三國史記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15(528) :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을 목베어 여론을 진정시키십시오(“近臣異次頓 或云處道 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

④『三國史記권 제16 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 8(172) :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여론은 말하기를 ...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臣 戰守孰便 衆議曰 ...”).

의 자료들에 따르면, 여론과 비슷한 의미인 중의(衆議)를 사용하고 三國遺事(529)에서도 여의(輿議)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론을 중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언론’(言論)과 유사단어로서 간쟁’(諫諍)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삼국시대는 초기부터 요즈음 사용하는 언론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후 諫諍과 혼용)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三國史記新羅本紀 第一, 始祖赫居世居西干, 三十八年(BC 20) , “王憤欲殺之, 左右諫之” ; 百濟本紀 第一, 始祖溫祚王, “十臣諫曰...” ; 高句麗本紀 AD 49, 臣有諫者, 彎弓射之”). 한편, 三國史記三國遺事에는 직간(直諫 ; 146, 고구려), 극간(極諫 ; 600 - 641, 백제), 시간(尸諫 ; 656, 백제) 등 간쟁의 종류를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군주의 정치득실에 대한 간쟁(諫諍)과 신하들에 대한 탄핵(彈劾)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관직명과 관청명(: 貞察, 大舍, 主簿, 侍御史 / 司正府, 栢臺)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이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웃어른이나 임금께 옳지 못하거나 잘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한다'(신기철신용철, 새우리말 사전(), 1980)고 정의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1)정직한 말로써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証也. 以正直之言悟人也) (2)조정안에서 임금의 허물을 멈추게 하는 것(止也. 內之則諫其君之過也) (3)군주의 뜻을 거슬리며 아뢰는 것(干也. 干君之意而告之) (4)옳고 그름이 서로 섞여 있을 때 그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更革也. 是非相閒革更其行也) (5)곧은 말로써 힘써 바르게 하는 것(直言勤正也)(中文大辭典第八冊, 諫條)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간쟁업무를 수행하는 관리인 간쟁지관’(諫諍之官)언론지관’(言論之官)으로 지칭하는 예(宣祖實錄, 167丁酉條, “自古未聞罪言論之官, 而能服其人心, 能安其國家者也”)로 보아, ‘간쟁’(諫諍)언론’(言論)은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당시 군주에 대한 신하들의 정치적 언론행위(간쟁)는 드물지 않았으며, 원시형태의 대간제도(臺諫制度) 역시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가적 언론사상이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형성과정에 있었다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문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순지거부삼간불청즉거(順志拒否三諫不聽卽去)의 사상(三國史記<高句麗本紀>(300),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 <高句麗本紀>(784), “群臣三上表諫, 乃止” ;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 미추왕)을 비롯하여 지부극간(持斧極諫)의 사상(直諫, 極諫, 尸諫, 極論, 極言, 直言 단어 많이 나옴), 광개언로(廣開言路)의 사상(<新羅本紀>(529), “古人問策芻蕘” ; ‘問群曲’), 종간여류(從諫如流)의 사상(<百濟本紀>(472), “不捨塗詈” ; <百濟本紀>(500), “忠言逆耳, 利於行, 虛己問政, 和顔受諫”), 민본위민(民本爲民)의 사상(養民, 愛民, 牧民 등의 단어 많이 나옴) 등과 관련되는 문장이나 용어들이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다. 군주언관들의 정치언론 행위규범들이 점차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⑦『三國史記권 제2 신라본기 제2 미추 이사금 7(268) :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春夏不雨 會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⑧『三國史記권 제24 백제본기 제2 비류왕 9(312) : 2월에 사신을 보내 순행하면서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하고, 홀아비홀어미부모없는 어린 아이자식없는 늙은 이[鰥寡孤獨]로서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자에게 곡식을 한사람 당 세 섬을 주었다("春二月 發使巡問百姓疾苦 其鰥寡孤獨不能自存者 賜穀人三石").

⑨『三國史記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2(332) : 2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백성 가운데 노인, 병자들을 두루 위문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老病賑給").

, , 의 자료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 백제 삼국 모두 '순시하면서 여론을 묻는 제도'(巡問制度)가 정착되어 있었으며, 특히, 신라는 신하들의 공론수렴공간(공론권)인 남당(南堂)이 있었다. 이처럼 삼국시대에는 유가적 언론사상에 입각한 언론제도가 현실정치에 정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대만의 최대 어원사전인 漢語大詞典(13, 1991)中文大辭典(10, 1980)에는 첨성대(瞻星臺) 또는 점성대(占星臺)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보아 중국에선 사용하지 않고,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독자적으로 사용한 명칭으로 보인다.

첨성대의 성격을 한자의 어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中文大辭典第六冊, 瞻條에 따르면, (瞻字)는 본다(), 내려다보다(臨視), 올려다보다(仰視)의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연결해서 ’()자를 사용하는 경우 올려다보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부합한다. ()나라 장읍(張揖)이 저술한 자전(字典)廣雅釋言篇에 따르면 (占字)(瞻字)는 같은 뜻(,瞻也)이며, ‘(占字)징조()를 보고 묻는() ’(說文, ,視兆問也)이라 기술하였다.

(星字)하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天空之羣耀也), ‘오성’(土金火木水, 五星), ‘이십팔수의 하나’(二十八宿之一,七星), ‘별자리’(星宿), ‘천체의 현상’(天文)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中文大辭典星條). 따라서, 첨성(瞻星 ; 또는 占星)'천체 현상을 관찰해서 길흉을 추측하여 판단하는 것‘(觀察星象以推斷吉凶)을 뜻한다.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첨성대에 대해 그 기능을 두고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다수설인 관측대'(관측시설)를 비롯하여, ‘제단’(祭壇), ‘단순한 상징기념물’, ‘불교건축물등이 있다. 필자는 군주의 정치득실에 대해 하늘(일월성신, 자연현상 포함)이 보내는 징후(災異, 五星의 특이형태, 일식월식, 혜성출현)를 관찰하고 '벼슬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賢者)들에게 그 재이대책을 묻는(求言) 장소임을 가리키는 상징적 건축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고대의 대표적 공론수렴제도인 비방지목(誹謗之木)과 진성지정(進善之旌), 감간지고(敢諫之鼓) 등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네거리나 대궐문에 상징적 표지(목패, 깃발, 石諫鼓 )를 달았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영대지복(靈臺之復)을 원용한 것으로 보이는 첨성대제도 역시 상징적 표식물이 있을 법하다.

신라의 첨성대는 남자군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위와 권력 장악력이 취약했던 선덕여왕이 중국의 영대(靈臺)에서 영감을 얻어 현실정치에 구체화시킨 공론권의 하나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라 궁성인 월성 가까이에 조성된 첨성대는 일상적으로 천문관측을 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또한, 상서(祥瑞)가 발생하였거나 화평기에 휴식공간(안압지라는 공간)으로 활용한 반면, 성변이나 재이의 발생시에는 군주의 정치득실이나 재이대책에 관해 벼슬살이하지 않고 숨어사는 선비(賢者)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권(公論圈 ; 公共領域 ; Öffentlichkeit)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석구조물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는데다가 높지도 않고 올라가기도 용이하지 않아, 실제 천문을 관측하는데 부적당한 구조물로 되어 있는 까닭에 '천문 관측대'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석구조물 근처에 높은 위치에서 하늘()을 관찰할 수 있는 망루(小樓)와 관련직무를 처리하는 관청건물(重閣)이 따로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덕여왕과 동시대인인 당나라의 왕적(王績)은 그의 시에서 "하늘의 운기를 관망할 때는 큰 건물(重閣)에 오르고, 별을 관찰할 때는 작은 누각(小樓)에 오른다"(王績 <晩年叙志示濯處士>, ’望氣登重閣,占星上小樓‘)라고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하는 기관'(천문대)의 상징물로서, 천문학(지구과학)적 지식과 부합되는 상징과 당시의 주요사상들인 유불선 삼교와 무속의 염원을 한데 아우르는 상징도 함께 표현한 구조물로 설계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첨성대의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있다. ‘(井字)우물’, ‘물의 시원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깊다(深也)깨끗하다(靜也)본받다(法也) 등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廣雅釋詁一易經,釋文 등에 따르면, ,法也로 풀이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본받다라는 의미이다. ‘(法字)본받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가 도덕경에 나온다. 道德經二十五章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도참(圖讖)이나 성점(星占)이 발달해서 동이족이 세운 예() 같은데서 성수(星宿)를 보고 풍작여부를 점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음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을 정도였다. 도참이나 성점(星占)은 우리나라 토속적인 선가(仙家 ; 나중에 중국 도가와 융합)의 부수적 학문임이 밝혀졌다(차주환, 1983, 38).

三國史記寶藏奉老條에는 무덕-정관(武德-貞觀) 연간에 나라사람(國人)들이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 ; 도교의 일종)를 믿었다. 당나라 고조가 이 말을 듣고 도사를 시켜 (고구려에)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술케 하여 왕과 백성들이 함께 들으니 ... ”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보장왕 재위와 비슷한 선덕여왕 재위 기간에도 도가사상이 유포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첨성대의 상층부인 정자석(井字石)군주는 천도(天道)를 본받는다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한편, 첨성대 중앙의 구자석(口字石)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첨성대(瞻星臺)(瞻字)(占字)는 같은 뜻이며, ‘자는 의 합성어로서 징조()를 보고 묻는() (說文, ,視兆問也)을 뜻한다. 첨성대의 口字石하늘이 재이(災異)나 성변(星變)을 통해 징조()를 보이면 군주는 재이의 소멸대책을 신민(臣民)들에게 묻는() 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三國遺事眞德王條에 따르면,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장소(靈地)가 있어서 나라에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들은 반드시 그 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 - 지금의 남산 - 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 - 지금의 영천 - 이라고 하였다.

진덕여왕의 직전 임금인 선덕여왕 때도 대신들의 공론수렴공간(公論圈)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국사를 논의할 때 참석한 대신(大臣)들은 알천공(閼川公)과 유신공(庾信公)을 비롯하여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등 6명의 신라귀족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위의 장소에는 일반백성들과 직급이 낮은 관리들은 참여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靑松山을 비롯한 이 네 곳은 중앙의 신라귀족들이 군주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대등하게 국사를 논의하던 장소라고 한다면, 남당(南堂) 하향식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군주가 중앙의 여러 신료들에게 나라의 정책과 왕의 정치득실에 대해 물어보던 장소였으며, 첨성대는 재이발생시 벼슬살이하지 않는 선비’(賢者)들이 상향식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재이에 대한 대책을 개진하는 장소로 상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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