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외/춘양지역

헌강왕순행길

춘양목연구회 2012. 12. 23. 21:27

헌강왕 순행길

 

 

헌강왕릉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m, 지름 15.8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cm, 너비 1289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헌강왕(憲康王)

 

헌강왕(憲康王:49)이 즉위하니, ()는 정()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태자(太子).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懿明)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

즉위하자 이찬(伊飡) 위홍(魏弘)을 배()하여 상대등(上大等)을 삼고 대아찬(大阿飡) 예겸(乂謙)으로 시중(侍中)을 삼고, 중외(中外)의 수사(殊死: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대사(大赦)하였다.

22월에 황룡사(皇龍寺)에서 승중(僧衆)을 재()하고 백고좌(百高座)를 베풀고 경()을 강설(講說)하니, 왕이 친행(親幸)하여 관청(觀聽)하였다.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전하였다.

3년 정월에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송악군(松岳郡:지금의 개성(開城))에서 탄생(誕生)하였다.

44월에 당()의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대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大尉大都督?林州諸軍事新羅王)이라 하였다.

7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려 하던 중 황소(黃巢)의 반란(反亂)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8월에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하였다.

52월에 왕이 국학(國學)[국학:대학(大學)]에 거둥하여 박사(博士) 이하의 교관(敎官)을 명하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케 하였다.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巡幸)할 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가무(歌舞)를 하였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衣冠)이 괴이하여 시인(時人)이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고기(古記)에는 왕즉위(王卽位) 원년의 사실(事實)로 말하였다.

6월에 일길찬(一吉飡) 신홍(信弘)이 반역(叛逆)하려 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10월에 왕이 준례문(遵禮門)에 임어(臨御)하여 궁사(弓射)를 관람(觀覽)하고 11월에는 혈성원(穴城原)에서 정렵(田獵)을 행하였다.

62월에 태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시중(侍中) 예겸(乂謙)이 사직(辭職)하므로 이찬(伊飡) 민공(敏恭)으로 시중(侍中)을 삼았다.

8월에 웅주(熊州)에서 가화(嘉禾)를 진봉(進奉)하였다.

99일에 왕이 좌우근신(左右近臣蘿)으로 더불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면(四面)을 바라보니, 서울의 민가(民家)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가락(歌樂)의 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내 들으니 지금 민간(民間)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써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고 물었다. 민공(敏恭)이 대답하기를, "()도 또한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즉위하신 이래로 음양(陰陽)이 고르고 풍우(風雨)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또 변경(邊境)이 안온(安穩)하고 시정(市井)이 환락(歡樂)하니 이는 (())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 ()들의 보좌(補佐)한 힘일 것이다. 내 무슨 덕()이 있으랴"고 하였다.

73월에 (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와 연(:잔치)할 때 주연(酒宴)이 무르녹자 왕은 금()을 타고 좌우(左右) 제신(諸臣)은 각각 가사(歌詞)를 지어 바치며 한껏 즐겁게 놀다가 파하였다.

84월에 일본(日本) 국왕(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황금(黃金) 300냥과 명주(明珠:야명주(夜明珠) 10개를 바쳤다.

12월에 고미현(枯彌縣)[고미현:지금의 전남(全南) 영암(靈岩)]의 여인이 한 번에 남아 3명을 낳았다.

92월에 왕이 삼랑사(三郎寺)에 거둥하여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각각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112월에 범이 궁정(宮廷)에 들어왔다.

3월에 최치원(崔致遠)이 당()에서 돌아왔다.

10월 임자(壬子)(임자:초하루)에 태백(太白)[태백:금성(金星)]이 낮에 보였다.

사신을 당()에 보내어 황소(黃巢)의 적()을 파()한 치하(致賀)를 하였다.

12년 봄에 북진(北鎭)이 알리어 말하기를, "적국인(狄國人)[적국인:여진인(女眞人)]이 진()에 들어와 판목(版木)(판목:나뭇조각)을 나뭇가지에 걸고 갔으므로, 그것을 취하여 바친다"고 하였다. 그 나뭇조각에는 "보로곡()寶露國)이 흑수국인(黑水國人)과 함께 신라국(新羅國)에 향해 화통(和通)하겠다"15()가 씌어 있었다.

6월에 왕이 병환(病患)으로 편치못하여 국내(國內)의 옥수(獄囚)를 사()하고 또 황룔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고 경(을 강설(講說)케 하였다.

75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東南)[동남:지금의 경주(慶州) 남산(南山) 동록(東麓) () 동면(東面)]에 장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강왕조>

 

망해사터(望海寺址)

 

망해사는 일명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던 절로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5)때에 세워졌다. 망해사의 창건은 연기설화와 관련되는데 바로 처용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유사 권제2 처용랑과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를 보면 신라 제49대 헌강왕때 서울로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 늘어섰지만은 초가집 한 채를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 이 때에 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서쪽)에 나가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 참으로 쉬던 중 졸지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들어 길을 잃어버렸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측근자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는 동해용의 장난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버려야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관원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근방에 절을 세우라고 했더니 이 명령이 떨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 버렸다. 이 때문에 이 곳을 개운포라고 이름을 지었다. 왕이 돌아온 후에 즉시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에 좋은 자리를 잡아 절을 지었는데 망해사라고 하고 또 신방사라고도 불렀으니 이는 용을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

 

이 절은 정조 10(1786) 울산부여지도(蔚山府與地圖) 신편읍지(新編邑誌)에는 영축산 동쪽에 있다.(在靈竺山東庵)”고 기록되어 있고 또 순조 31년본(1831) 울산부 읍지에도 나타나지만, 광무 3년본(1899) 울산읍지(蔚山邑誌)에는 지금은 이미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은 1831년에서 1899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보물로 지정된 부도 2기와 그 뒤편에 있는 대웅전터 만이 확인되고 있다. 한평 조선 중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울산읍지에는 절 옆에 망해대가 있어 선비들이 대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고 글을 짓거나 시를 읊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그 자리를 찾을 수 없고 다만 울산팔영(蔚山八影)의 하나인 한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망해대(望海臺)

 

정포(鄭浦)

 

絶壁凌晴漢 高臺控大洋

遙看水色接天光 百里共蒼蒼

石室知秋早 松扉報曉忙

幽人呼客瞰東方 紅日上扶桑

 

끊어진 벽은 개인 하늘을 업신여기고 높은 누대는 큰 바다를 잡아 당기네

멀리 보니 물 빛은 하늘과 접해서 백리에 푸르고 푸르네

돌집에는 가을이 먼저 옴을 알겠고 소나무 문짝은 새벽됨을 알려주네

한가한 사람 손님을 불러 동방을 바라보니 붉은 해 부상에 올라오네

<부상국 : 중국의 전설에서 동쪽 바닷속에 있다고 일컬어진 나라>

 

망해사터 석조부도

 

이 부도는 현재 망해사 법당의 북쪽 50m 쯤 남쪽으로 장대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마련된 터에 동, 서로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도굴 파괴되었는데 199011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구성된 부도는 건조양식이나 각 부의 수법에 있어서 서로 같으며 전체 규모에 있어서도 같은 크기이다. 다만 현재 서부도는 파손의 흔적이 없어 완전한 편이나 동부도는 파괴가 심하여 각 부에 마모가 많고 특히 탑신과 옥개석이 크게 파손되어 있다.

 

이 부도는 전형적인 신라 석조 부도의 양식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부도의 각부 구조수법이나 조각됨이 섬세하나 형식화된 감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도의 형식을 보면, 높이는 약 4m로 여러 장의 높직한 직사각형의 편편한 돌을 얽어서 정사각형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였다.

 

기단 위에 하대석 8각 각면에는 얕게 조각된 안상(眼像)을 음각하고 그 위에 여러 잎을 가진 연꽃 8개가 새겨져 있으며 그 꽃잎의 끝에는 귀꽃이 있다. 중대석의 각 모퉁이에는 기둥형(柱形)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의 3단의 각형 위에는 단엽 연꽃이 6판씩 이중 조각되어 있다.

 

각 모퉁이에 기둥형을 새긴 탑신부의 전후좌우 4면에는 문비(門扉)를 새겼으며 부서진 부분으로 보아 이 곳에 사리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유실되고 없다.

 

이 부도의 동편에는 조선시대의 부도가 세워져 있는데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던져주고 있다.

 

처용암(處容巖)

 

울산 남구 부곡동 석유화학단지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유공이 나온다. 왼쪽길을 따라 계속 가면 황성동이 나오면서 세죽 나루터로 들어가는 입구에 처용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400m쯤 가면 바다 가운데에 조그마한 돌섬이 보이는데 여기가 처용암이다.

 

이 바위에 대해 경상도 지리지는 영이지적(靈異之跡)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을 남쪽 37리에 포가 있는데 개운포라 하며, 가운데 한 바위가 있어 이를 처용암이라 한다. 신라 때 사람이 그 바위 위에서 나왔는데 용모가 기괴하여 사람들이 처용암이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처용암 조를 보면 고을 남쪽 39리 개운포 가운데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사람이 있어 그 위에서 나왔으며 모양이 기괴하고 가무를 좋아하며 그 때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 지금도 향악에 처용희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울산군 고적을 보면, “세상에 전하기를 처용이 바위아래에서 나왔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바위는 처용설화와 관련있는 돌섬이다.

 

삼국유사 권 제2 처용랑과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전략)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곧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이 탄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찬미하면서 춤과 노래를 연주하였다. 그의 아들 중 하나가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서 왕의 정치를 보좌케 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고 하였다. 왕이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그의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다시 급간(給干)벼슬까지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너무도 고왔기 때문에 역병 귀신이 탐을 내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면 그 집에 가서 몰래 데리고 잤다. 처용은 밖을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리 속에 두 사람이 누운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만 물러 나왔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서라벌 밝은 달에 / 밤들이 노닐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어라 /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마는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때에 귀신이 처용의 앞에 정체를 나타내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아내를 탐내어 지금 그녀를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게 생각한 나머지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을 그려 붙여둔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소하였다. 이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 나쁜 귀신을 쫓고 복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11 헌강왕조를 보면 3월에 왕이 국동의 주군을 순행할 새, 어디서 온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 나타나 가무를 하였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시인이 산해의 정령이라 하였다.(고기<古記>에는 王卽位年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월명항을 보면, “신라 헌강왕이 학성에 유람하고 개운포에 이르니,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의복으로 임금의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다.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스스로 처용이라 이름짓고 밤마다 시가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나 마침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 하였고 그가 가무하던 곳을 월명항이라 이름하였다. 인하여 처용가와 처용무를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연출하였다.”

 

이상이 처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울산에는 온산면에 처용리가 있고 상개동을 상개운, 하개동을 하개운, 황성동을 개운포라 부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온 곳이 황성동 세죽마을 앞바다에 있는 바위 밑이라 하여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불러왔다. 이러한 처용의 설화에 얽힌 처용암은 온산면 방도리의 모고도와 함께 이 지방의 아름다운 명승지로 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온산의 석유화학단지로 인하여 공해가 심해 사람들이 찾지 않고 있다.

 

처용의 실체에 대하여 학계의 연구도 다양한데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향가연구에서 시작하여 처용을 승려나 용으로 보는 견해

2.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관점

3. 귀족문화에 대항하는 지방문학이라는 주장

4. 화랑도로 보는 주장

5. 처용을 신라말기의 지방호족세력으로 보고 처용의 상경을 신라의 지방에 대한 포섭 견제책으로 해석해서 이를 기인제도의 기원과 연결지우는 역사적 사실의 분석추구

6. 처용을 이슬람상인으로 보고 이슬람세계와의 교역관계를 밝히고 그 당시 울산만이 국제항이었음을 지적하는 견해

7. 처용을 용신과 역신(疫神)의 투쟁으로 보아 역신은 악신(惡神)이고 용신은 선신(善神)이라 하여 처용을 선격신으로 승화시켜 악신의 구축설화로 보는 입장

8. 처용을 동해용의 아들이라 하여 개운포와 망해사 청건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 관련시켜 그 유래를 신비스럽게 하려는 작위에 불과하며, 처용에 관한 가무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내려오는 것을 보아 신라 하대의 저명한 가면극(假面劇) 배우로써 그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라는 설

9. 처용설화를 바다의 신인 용이 노하여 파도를 일으키고 구름과 안개를 일게 하는 일을 달래고 수로에 해가 나와 안전하게 다니기를 기도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왕래하는 동해안 울산 바닷가에 망해사를 짓게 된 연고설화이며, 또 처용랑을 해()의 신으로 보고 햇님의 넋인 까마귀()라 하는 견해

 

울산 대왕암

 

대왕암 공원은 우리나라에서 울주군 간절곶과 함께 해가 가장 빨리 뜨는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산책이 즐거운 솔숲 그늘과 봄이면 벚꽃, 동백, 개나리, 목련이 어우러져 이곳을 지나다 보면 자신은 벌써 시인이 되는 듯 한 착각에 빠진다. 대왕암 공원은 기암괴석과 마치 전주처럼 곧게 치솟아 있는 15천여 그루의 아름드리 송림, 동해의 탁 트인 푸른 바다 등 동해안에서 해금강 한쪽을 옮겨다 놓은 듯 그 경관이 절경이다. 울산 12경 가운데 제4경으로 선정되었다.

 

대왕암공원은 도심 속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귀한 휴식처다. 28만평에 달하는 산뜻한 공간을 가진 이 공원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 해변을 보고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킬 수 있는 일산해수욕장의 모래밭이 펼쳐져 있어 더욱 좋다. 우리나라 동남단에서 동해 쪽으로 가장 뾰족하게 나온 부분의 끝 지점에 해당하는 대왕암공원은 동해의 길잡이를 하는 울기항로표지소로도 유명하다. 이곳 항로 표지소는 1906년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세워졌으며, 이곳 송죽원에서는 무료로 방을 빌려주어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민박을 제공하기도 한다.

 

공원입구에서 등대까지 가는 길은 600m 송림이 우거진 길로, 1백여 년 아름드리 자란 키 큰 소나무 그늘이 시원함과 아늑함을 선사한다. 송림을 벗어나면 탁 트인 해안절벽으로 마치 선사 시대의 공룡화석들이 푸른 바닷물에 엎드려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의 집합소이다. 대왕암을 비롯하여, 괴이하게 생겼다 하여 쓰러뜨리려다 변을 당할 뻔 했다는 남근바위, 그리고 탕건바위와 자살바위, 해변 가까이 떠 있는 바위섬, 처녀봉 등이 시야를 꽉 채운다. 불그스레한 바위색이 짙푸른 동해 바다색과 대비되어 아주 선명하다.

 

마주 보이는 대왕암은 하늘로 용솟음치는 용의 모습 그대로다. 점점이 이어진 바위를 기둥삼아 가로놓인 철교를 건너면 대왕암에 발을 딛게 된다. 댕바위 혹은 용이 승천하다 떨어졌다 하여 용추암이라고도 하는 이 바위는 신라 문무왕의 호국룡 전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평시에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 하였다. 대왕이 재위 21년만에 승하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왕석에 장사를 지내니 마침내 용으로 승화하여 동해를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장사 지낸 문무왕의 해중릉을 대왕바위라 하며 그 준말로 '댕바위'라 하며 경주시 양북면에 있다.

 

대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의 왕비도 세상을 떠난 후에 용이 되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호국의 대룡이 되어 그의 넋은 쉬지 않고 바다를 지키거늘 왕비 또한 무심할 수가 없었다. 왕비의 넋도 한 마리의 큰 호국룡이 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을 향하여 동해의 한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지금의 대왕바위라 불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말이 줄어 댕바위(대왕암)라 하였으며, 또 용이 잠겼다는 바위 밑에는 해초가 자라지 않는다고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 전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기사에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라고 짧게 전할 뿐이다.이 전설은 후대 사람들이 경주 대왕암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그 모양도 다소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창작해낸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경관에 전설이 하나 있으면 그곳은 더욱 신비로움을 더하는 것 아니겠는가?

 

대왕바위 북쪽으로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일명 남근바위라 한다. 바위를 남근바위 또는 여근바위라 부르는 신앙은 오래전부터의 민간신앙이다. 그런데 남근바위만 있고 여근바위는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남근바위의 북쪽 일산해수욕장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작은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곳을 여근바위 또는 민바위라고 부른다.

 

남근바위의 북쪽 벼랑에는 천연동굴이 하나 있다. 예부터 전해오기를 이 동굴에는 한 마리의 청룡이 살면서 오가는 뱃길을 괴롭히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알게 된 동해 용왕은 크게 노하여 청룡을 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신통력을 부려 굴의 가운데를 큰 돌을 넣어 막았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동해 용왕을 위하여 풍어를 비는 용왕제를 지냈다는 전설이 있다.

 

 

울산 울기등대 구등탑(舊燈塔, 근대문화유산 제106)

 

울기등대는 19052월 목제로 만들어진 등간(燈竿)으로 건립되어 방어진항을 유도하는 항로표지로 사용되었다가 1906326(추정)부터 현재의 장소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새로 설치되어 19871212일까지 80여 년간 사용되었다.

 

이 기간 일제 강점기 때 울산의 방어진항은 성어기에 매월 67백 척의 어선과 34천명의 어부가 드나들 정도로 번성하였고, 포경업도 더불어 발달하였다. 또한 관련 산업인 방어진 철공소와 무라카미(村上) 조선소가 들어서기도 하였다. 이런 발전에 따라 19551212일 부산지방 해무청 방어진 출장소가 설립되게 되었다.

 

하부 원형 상부 팔각형 구조로 높이는 9.2m이다. 건립 당시는 최고 높이가 6.1m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변화에 197211월 팔각형 콘크리트조로 3m 수직 증축하였다. 그 후 주변 해송들이 자라남에 따라 구등탑이 보이지 않게 되자 19871224m 높이의 신등탑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신등탑은 불을 밝히는 촛대모양을 형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울산지방해양수산청의 보존 의지로 현재까지 원형이 잘 유지되어 왔으며,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새로 지어진 등대와의 비교를 통해 당시 건축술과 그 기법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200494일 문화재청에 의해 근대문화유산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울산 주전봉수대

 

주전봉수대는 높이 6m, 직경 5m1976년 울산향토사연구회의 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147호로 지정되었으며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직봉의 봉수대와는 달리 간봉의 봉수대는 연기를 멀리 보내기 위해 5봉이 아니라 단봉으로 크게 지었으며, 세종 때의 일반적 모양인 사각형과는 달리 원형이 특징이다. 주전봉수대는 발견된 모양에 따라 석대 위에 복원하였다.

 

한편 해안가 봉수대의 경우는 연기를 높게 올리기 위해 보통 아궁이와 굴뚝을 함께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주전봉수대의 경우 원형을 복원하였다고 하지만 아궁이와 굴뚝이 없는데, 이는 1982년 경상남도가 보수하는 과정에서 계단과 석문을 잃어버렸고 현재는 원통모양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봉수대에 올라서면 짙푸른 동해바다가 넋을 잃게 한다. 봉수대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 주전해안은 몽돌해변이 매우 아름다워서 울산 12경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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