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외/춘양지역

각화사와 비녀소전설

춘양목연구회 2017. 6. 21. 10:59

비녀소전설과 구문소전설.입니다.

 

봉화군의 비녀소전설 [봉화군.춘양면지명유래]

태백시의 구문소전설은 전해지는 내용이 같습니다.

아래는 간단한 정리입니다.

 

비녀소전설 : 나북당앞 운곡천에 비녀쏘와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동점리 고갟길 낙동강 상류에 동점 구무쏘 물속에는 서로 연결되는 구멍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왕때 효도라는 왕자가 궁중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전국을 유람하던중 재산면에서 백정의 딸 월선낭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서라벌에서 호출이와 왕자가 갈 때 금비녀를 주었는데 이듬해 월선낭자에게 전갈하기를 5월 단오날 삼척 구무소에서 기다릴테니 오라고 하여 찾아가는 길에 의양리 비녀쏘에서 쉬는데 개울물이 갑자기 소용돌이 치는 바람에 놀라 물에 비녀를 잃어 버리고 그냥 구문소에 가서 왕자를 만나 비녀를 잃었다하니 (이동네사람들에게 말했다.) 왕자는 노하며 그냥 돌아가기에 눈물을 흘리며 구무소에 빠져 죽으려고 뛰어 들었는데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밭에 나와 있었고 옆에 금비녀가 있었다. 이는 하늘이 애처로운 낭자를 구하여 준 것이

. 월선은 금비녀를 들고 서라벌러가서 효도왕자를 만나 오대산에서 속세를 떠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춘양면 운곡천에는 2~30년전만 하여도 거북소, 둥근소,  비녀소, 소로리소 등이 있었다.

 

비녀소전설과 구문소전설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전설은 청량산에 청량사가 축조될 때의 상황을 엿볼수있게하는데,

월선낭자라는 지역토호세력과 효도왕자로 대표되는 중앙의 거래관계를 보여줍니다.

 

사찰세우기는 신라의 국책사업으로서. 원효가 청량사프로젝트를 세우고, 호도왕자는 중앙부처사무관. 월선건설이 시행사로서 청량사를 축조한다.

 

그런데 청량사가 완공될 때 쯤 다른 대형건설계획의 예산이 섯다는 정보가 돕니다.

청량산축조시행사 월선은 경험과 기술력을 앞세워 효도에게 낙찰을 약속을 받습니다.

 

한편, 신라중앙에서는 태백산을 등정하는 유리한 코스로서 구문소 뒷편 태백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됩니다. 부석사. 축서사. 청량사를 집중 개발함으로서 투자의 비효율성과 함께 난개발문제도 있었고.

, 신라의 위엄과 문화적우월성을 잘 나타내는 화엄대찰이 축서사에서 낙산사까지 이르는 태백. 삼척지역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으로 지방분권. 분산투자도 고려대상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월선건설이 태백으로 갈 즈음, 춘양지역 토착세력인 람화사가 월선을 당깁니다. 비녀를 람화사 바로 옆, 비녀소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컨소시엄을 형성하였다는 말입니다.

 

월선은 효도왕자와 만나 청량사를 축조한 자신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태백산에 대한 접근성. 람화사까지 합병중창하는 안으로 각화사입지 청사진을 제시하게됩니다.

 

효도왕자가 불같이 화를내고, 월선이 죽자사자 물에빠지고하는 일들이 사업계획변경안에 대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결국 각화사가 창건되는데, 월선이 꼭 당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라왕실에서도 감안할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령, 청량사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펼쳐져 유기적관리가 가능한 단위구조라던가, 경주에서 출발하는 태백산등정코스라던가.

 

어쨌든 천년의 시간을 넘어 온 이 이야기는 봉화군과 각화사에 대한 중요성의 일면을 보여주는데요, 그것을 보충할만한 이야기들이 좀 더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이 봉화 각화사에 들어오는데요, 사고지를 절 뒤편에 지어 왕조실록의 안전을 승려에게 부탁하는 일은

조선정권과 역성혁명의 당위성이 위협받을 수 있는, 또 국가지배사상의 화해와 융합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됩니다.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불교를 국가지배이념으로 삼고있던 고려를 무너뜨린 정권입니다.

조선은 불교를 극복하는 이념으로서 유교를 받아들입니다.

불상의 코가 깨진다거나, 승려를 천민으로 대우하여 한양의 사대문에는 들어오지못하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청. . 왜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맹수우리 속에 던져진 사슴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 불교계의 활약이 컸고, 사명당의 경우는 외교적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실록은 왕과 조정의 정치적언술들을 사관이 사실로 적은 기록으로 조선왕조의 보물이자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존심입니다. 그리고 객관성을 유지하기위하여, 또는 보존의 필요성으로 실록은 춘추관사고,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실록들이 다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았을 때,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겼습니다.

임진왜란을 끝나고,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전등사묘향산·태백산·오대산사고에 보관하게됩니다.

 

관청에 보관하였던 실록을 신라시대의 유교의 조선왕조는 한반도를 평정하고, 외세를 제압한 신라와 불교에 정신적으로 의탁하고, 화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쉽지않은일인가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있다.

이것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과 비견될 일로서 소통의 끝판왕. 세계역사상. 두 번없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왕조실록은 각화사사고지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까지보면 춘양.석현은. 두왕조에서 인정한 지역조건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전설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사에서 가치가 높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의 협약 및 권고와 같이 문화재는 본래 자리에 있어야 그 빛을 발하며, 역사와 사회에 녹아들어가 새 문화를 창조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표상하게 된다. 이러할 때 문화의 품격이 높아진다

 

십승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십승지는 대부분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다.

 

십승지는 조선 후기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었다. [외적으로부터. 국가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르 지키는]그들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생활을 일구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로 생태환경의 위기와 거주의 진정성이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서, 승지의 문화전통과 생활사의 의미를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 귀농지.

 

십승지에 대한 위치와 해석이 분분하지만

 

각화사와 사고지가 만나는 자리는 십승지지 중 최고의 지점으로

한반도의 두 체제. 강력했던 신라와 신중했던 조선이 공인한 최고의 지지이면서,

조선의 유교체제와 신라의 호국불교가 융합하는 유일한 자리이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우리고장의 십승지로서

 

청량사. 각화사. 축서사. 부석사는

 

신라의 화엄사찰입니다.

 

이들 화엄사찰은 한반도역사상 가장강성했던 시기에 축조된 지역의 가장 중요한 문화자산입니다.

 

원효. 의상

삼산오악사상. 사상의 확장.

태백산은 북악.

삼국통일과 호국정신을 불교정신과 융합시키고 왕권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부처 본인. 인자하고 덕이 많고 평화로운 이미지 그대로 백성들에게 덕망을 쌓았습니다. 원효/요석공주와 의상은 당시의 권력자입니다.

사찰은 신라의 관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남해의 보리암. 앞이 잘 보임. 바깥에서는 잘 안보인다.

 

신라의 사찰건립이 양백지간사이 촘촘하다가. 양양 낙산사로 뜁니다. 그 사이 넓은 공간에는 신라대찰이 없습니다.

동해바다는 국경입니다.

 

당시의 사찰축조기간은 약 12년에서 15년으로 권력자의 권위와 형식을 드러내는 대규모 국책프로잭트였습니다.

 

신라의 왕은 삼산오악에 올라 정기적으로 제를 지냅니다. 초기신라시대에는 경주부근에 북악이 있었으나 국토가 확장되면서 태백산이 북악이 됩니다.

 

의상 축서사673를 짓고, 부석사676, 안동 봉정사682를 낙산사671짓습니다.

원효는 청량사663를 짓고, 13년후 각화사676를 창건합니다.

 

삼국통일676 당과의 전쟁,. 고구려. 백제. 유민융합정책이 있었고요,

 

한반도는 오랜시간 외세의 침략을 격는 입장이었는데,

이 시대는 한반도의 황금시대로서

바깥으로 왜, . 돌궐 등 외적을 압도하였고,

내부로는 불교문화창달. 통일이룩한 시기였습니다.

 

각화사는 역사상 한반도가 가장강성했던 시기에 축조된 지역의 가장 중요한 문화자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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