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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유기의실제와현황

춘양목연구회 2012. 12. 23. 10:41

529회 문화강좌<文化財 解說> 敎材 2006-11 2006. 10. 26()

 

 

統一新羅 綠釉기와의 실체와 현황

 

 

강 사 : 김 유 식 학예연구관

국립경주박물관

 

 

 

 

장 소 : 경주문화원 시청각실

후 원 : 경주시 경주문화원

 

 

 

 

統一新羅 綠釉기와의 실체와 현황

 

 

金 有 植 學藝硏究官

(國立慶州博物館)

 

 

. 머리말

統一新羅기와는 문양이 다양하고 화려하다. 뿐만 아니라 제작기술이 우수하여 고대 동아시아 기와 가운데 가장 우수한 기와로 평가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늦게 기와 제작 기술을 수용하였지만, 독창적으로 변화 발전하여 한국 기와 발달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렇게 통일신라 기와가 화려하게 발전하게 된 요인에는 삼국시대부터 내재한 기술적 응집력이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통일신라의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당시 기와를 다루던 장인들의 능란한 예술적 솜씨가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신라 기와는 절정에 달한 화려한 예술품의 장막에 가려 지금까지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지 못했다. 이러한 원인은 통일신라 기와가 단편적인 자료소개 내지는 연구사적인 정리가 미약하여 우리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소홀히 다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통일신라 기와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고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향후 고무적인 분위기로 전환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라와당이 최초로 제작된 시기는 6세기 전후로 추정하고 있지만, 6세기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와당은 製作공정이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와당은 建築物莊嚴直結되므로 궁궐, 사원, 권력층의 가옥 등 일부 특수 건축물에만 한정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녹유와는 유약을 표면에 시유하기 때문에 와당보다 제작이 더욱 어렵다.

신라 녹유와가 언제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出土遺物로 보아 7世紀後半 頃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新羅 綠釉瓦에 대한 硏究는 비교적 活潑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事實이다. 原因綠釉瓦出土 數量이 다른 기와들에 비해 적고, 硏究 進行必要綠釉의 성분, 燒成度, 胎土 分析 등과 關聯한 구조적 분석의 難解性 때문이다. 本考는 이러한 점을 念頭해 두고 新羅 綠釉瓦에 대해서 用途別, 出土地別簡略히 살펴보고, 文獻記錄檢討하여 綠釉瓦 實體把握試圖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녹유를 제작하였던 제작지와 출토지, 그리고 장인들의 예술적 의지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 녹유의 정의

 

綠釉釉藥인 잿물이나 硅酸鉛丹을 섞고, 發酸劑또는 을 섞은 것이다. 酸化焰에서는 靑綠色을 띠며, 酸素가 부족하거나 鐵分이 많으면 褐色系統으로 된다. 綠釉溶解度700800정도여서 가마의 溫度가 그 이상일 경우 모두 타 버린다. 이러한 原因으로 인해 綠釉瓦胎土表面硬度가 무른 軟質大部分이며, 대체로 灰色, 灰褐色 또는 赤褐色을 띤다. 統一新羅時代에는 綠釉瓦와 함께 綠釉陶器多量 製作되어 使用되었다. 이러한 녹유와는 다양한 색이 표면에 보이므로 간혹 도자기계통으로 분류하지만 공정, 소성법과 태토 등에서 도자기와 전혀 다르다. 또한 소성온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일반 기와들과 함께 소성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녹유기와만 전용으로 소성하던지, 보통 가마에서 구우려면 별도의 주의를 요하게 된다. 또한 유약의 혼합 성분이 복잡하여 당시 녹유 유약을 만들어 내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지적된다.

 

 

. 出土遺物分析

 

1) 用途別 分類

慶州附近에서 出土綠釉瓦數量破片包含하여 약 150여 점에 달한다. 出土綠釉瓦들을 用途別로 분류하면, 수막새, 암막새, 鬼面瓦, 鴟尾, 綠釉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綠釉수막새는 雁鴨池에서 出土된 것이 대부분이며, 製作技法形式的 特徵으로 보아 7世紀後半8世紀製作된 것이 주류를 이룬다. 時期製作綠釉수막새는 蓮花文를 이루고 있다. 특히 綠釉蓮花文수막새는 文樣의 새김수법과 構圖 그리고 녹유 유약을 정교하게 施釉한점으로 보아 當時 製作된 기와 가운데 가장 精巧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綠釉 암막새는 出土數量이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出土地가 밝혀진 곳으로는 雁鴨池唯一하다. 암막새는 唐草文을 문양면에 넣고 표면에 두껍게 釉藥을 시유하여 문양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암막새는 문양면에만 유약을 시유하였다.

綠釉鬼面瓦雁鴨池, 月城, 四天王寺址 등에서 出土되었다. 大部分綠釉鬼面瓦文樣構圖精巧할 뿐만 아니라 量感있게 묘사하여 귀면와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특히 周緣部除外한 여타 部分은 매우 양감있게 처리하여 당시 공예수준을 추정케 해 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귀면와는 流麗하게 描寫火焰文瑞氣, 그리고 周緣部唐草文連珠文이 적절한 구도를 보이고 있어 걸작으로 평가된다.

綠釉鴟尾皇福寺址에서 1점이 出土되었다. 鴟尾表面附着綠釉大部分 脫落狀態이며, 曲線形態로 보아 鴟尾의 몸통편으로 여겨진다. 몸통에는 寶珠形陰刻文樣裝飾하였던 痕迹이 남아있다. 胎土는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表面硬度는 약한 편이다. 녹유치미가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는 녹유치미도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綠釉塼皇龍寺址, 四天王寺址, 感恩寺址, 興輪寺址, 法光寺址 등에서 出土되었고, 綠釉瓦 가운데 가장 많은 數量을 차지한다. 대부분 綠釉塼形態方形이며, 두께가 두꺼워 法堂의 바닥을 裝飾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事實로 보아 統一新羅 中期부터는 法堂의 바닥을 綠釉裝飾하였을 것으로 推定되며, 向後 遺蹟 發掘進行된다면 出土數量이 계속 增加可能性이 엿보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綠釉瓦는 특수한 부분의 기와에 다수 시유되었고, 수키와에 전혀 시유되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은 녹유가 귀중한 재료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부분에만 局限하여 使用한 것으로 把握된다. 따라서 綠釉施釉된 기와들은 극히 纖細하고 精巧하여 當時 最高級 기와로 使用된 것으로 推定된다.

지금까지 出土되어 國立慶州博物館所藏되어 있는 綠釉瓦用途別整理하여 보면 아래의 <1>과 같다.

性格

連番

出土地

蓮花文

圓瓦當

唐草文

平瓦當

鬼面瓦

奏樂天人像塼

鴟尾

附椽瓦

裝飾塼

宮闕

1

月城垓字

 

 

1

 

 

 

 

 

2

雁鴨池

(東宮址)

11

(破片包含)

1

(唐草文)

66

 

 

 

 

 

寺院

成典寺院

3

皇龍寺址

 

 

 

24

3

 

 

 

4

興輪寺址

(靈廟寺)

 

 

 

2

 

 

 

 

5

四天王寺址

 

 

1

2

 

 

 

 

6

感恩寺址

 

 

 

1

 

 

 

 

7

皇福寺址

 

 

 

 

 

 

1

 

願刹

8

佛國寺

 

 

 

 

 

1

 

 

9

法光寺址

 

 

 

65

 

 

 

 

其他

10

菊隱寄贈品

 

 

 

 

 

 

 

1

(寶相花文)

發見品

11

未詳

 

1

(飛天文)

 

 

 

 

 

 

雁鴨池로 볼 때, 綠釉鬼面瓦는 다른 遺物에 비해 出土數量이 매우 많다. 이러한 사실은 녹유가 당시 일반기와에는 널리 이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가 되겠다. 그리고 極少數綠釉鴟尾, 綠釉附椽瓦, 綠釉飛天文平瓦當이 보이고 있어 向後 多樣用途綠釉瓦들이 出土可能性도 엿보인다. 또한 四天王寺址에서는 출토된 다량의 綠釉四天王像塼은 당시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탑 부재로 녹유를 사용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사찰 가운데 법광사지 법당에서는 綠釉塼이 다량 出土되어 法堂 바닥까지 綠釉塼을 깔아 使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出土地別 分類

(1) 宮闕

新羅宮闕址月城雁鴨池(東宮址)에서 出土綠釉瓦破片包含하여 약 80여 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新羅宮闕月城에서는 1점의 綠釉鬼面瓦片出土되었다.

月城出土 綠釉鬼面瓦(1)殘片으로써 表面釉色綠色白色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綠釉 表面白色으로 나타나는 原因釉藥酸化되어 나타나는 現狀이고, 그 내부에는 녹유의 색이 드러난다. 胎土砂粒包含된 붉은색의 軟質系이고, 表面硬度는 약한 편이다. 鬼面瓦側面唐草文을 넣었고 푸른 釉藥施釉하였다.

統一新羅時代東宮址推定되는 雁鴨池에서는 發掘에서 多量綠釉瓦出土되었다. 出土綠釉瓦種類蓮花文圓瓦當, 唐草文平瓦當 그리고 鬼面瓦 등으로 代表된다. 蓮花文圓瓦當(2-1, 2-2)表面綠色(2-1)인 것과 綠褐色(2-2)인 것으로 區分되며, 3점 모두 뒷면에 촉이 있어 木材 끝단에 附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綠褐色綠釉蓮花文圓瓦當綠色을 띠는 것보다 小形이며, 높은 溫度에서 燒成되어 表面硬度가 단단하다. 綠色綠釉蓮花文圓瓦當의 뒷면 中央에는 接合容易하게 하기 위한 2가량의 陰刻線이 있으며, 周緣 턱면에는 唐草文施文되어 있다. 前述3점의 綠釉蓮花文圓瓦當文樣配置, 釉藥狀態, 새김수법 등이 精巧하고, 文樣 形態로 보아 7世紀後半 頃製作된 것으로 推定된다.

雁鴨池에서 出土綠釉唐草文平瓦當(3)文樣面綠色의 유약을 두텁게 施釉하였기 때문에 唐草文은 뚜렷하지 못하다. 胎土赤色을 띠며, 낮은 溫度에서 燒成되어 表面硬度가 약한 편이다. 釉藥部分的으로 剝落되었지만 透明하고 光澤이 난다. 綠釉平瓦當釉藥이 두껍게 施釉되어 文樣이 드러나지 않는 점과 胎土軟質인 점, 그리고 釉藥處理未熟한 점 등이 큰 特徵이다. 이러한 綠釉平瓦當慶州地域에서 出土가 매우 드물다.

雁鴨池에서는 綠釉鬼面瓦가 약 70(破片包含) 정도 出土되었는데, 釉色綠色, 黑綠色, 赤褐色, 黑灰色 등이다.

綠色鬼面瓦光澤이 없는 것과 光澤이 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光澤이 나지 않는 鬼面瓦(4)釉藥의 두께가 매우 얇아 마치 칠을 한 듯하며, 彫刻의 새김수법은 다른 鬼面瓦에 비해 볼륨감, 文樣構圖 등에서 洗練되지 못하다. 세 종류의 綠色鬼面瓦 가운데 透明한 두 종류의 鬼面瓦(5, 6)不透明한 것보다 볼륨감이 강하고 文樣의 새김이 활달한 차이를 보인다.

나머지 세 종류의 鬼面瓦(7, 8, 9)黑綠色, 赤褐色, 黑灰色이다. 이 가운데 黑綠色鬼面瓦(7)側面上面部分的으로 綠色觀察되며, 비교적 釉藥을 고르게 施釉하여 表面이 매끄러운 편이다. 赤褐色(8)鬼面瓦釉藥剝落이 심하다. 黑灰色鬼面瓦(9)燒成溫度가 매우 높고 硬度가 단단하며, 表面氣泡形成되어 거친 편이다. 6점의 鬼面瓦 가운데 不透明綠色鬼面瓦를 제외한 나머지는 볼륨감이 강하고 構圖安定되어 있다. 또한 側面에는 모두 華麗唐草文帶施文하였다.

雁鴨池 出土 기와 중 蓮花文圓瓦當, 鬼面瓦에서 볼 때, 文樣洗練處理, 能熟하게 瓦范에서 찍어내어 응축된 彫刻 솜씨를 느낄 수 있게 하는 當代 最高匠人製作한 기와들에만 綠釉使用하였다고 判斷된다. 특히 綠釉鬼面瓦의 경우 비록 틀을 使用하여 찍어낸 것이지만, 統一新羅 初期 瓦塼工藝代表할 수 있는 最高傑作品으로 보인다.

 

(2) 寺刹

皇龍寺址에서 出土綠釉瓦法堂內部莊嚴했던 裝飾塼과 바닥전이 있다. 이 가운데 裝飾塼(10-1, 10-2)綠色黃色 두 가지가 있다. 綠色(10-1)을 띠는 裝飾塼胎土緻密하고 높은 溫度燒成되어 表面氣泡가 많이 드러나 있다. 특히 黃色(10-2)의 경우, 胎土黑色을 띠며 釉藥綠色보다 두껍게 施釉되었다. 이 밖에 皇龍寺址에서는 金堂使用된 것으로 推定되는 多數의 바닥전이 出土되어 當時 皇龍寺 法堂의 화려함을 斟酌할 수 있다.

興輪寺址(推定 靈廟寺址)에서 出土小形 바닥전(11)胎土는 붉은색을 띠며, 釉藥表面酸化되어 白色을 띤다. 釉藥은 두껍게 施釉되었고, 部分的으로 玲瓏한 푸른빛이 드러난다.

四天王寺址 出土 鬼面瓦(12)는 매우 높은 溫度燒成되어 表面硬度가 단단하다. 鬼面瓦表面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釉藥을 덧칠한 것 같이 表面이 고르지 못하고 光澤이 없다. 그러나 남아 있는 文樣으로 보아 매우 精巧鬼面瓦였을 것으로 推定된다.

또한 四天王寺址 出土 方形塼(13)硬度가 매우 단단하고, 釉藥을 얇게 施釉한 점이 特徵이다. 푸른빛을 띠고 있는 釉藥表面에는 가는 氷裂이 드러나 있고 表面은 거칠다. 胎土緻密한 편이며 붉은색을 띠고 있다. 四天王寺址에서 出土綠釉四天王像塼表面裝飾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感恩寺址 出土 바닥전(14)表面 全體白色으로 酸化되었다. 表面硬度는 무른편이며, 砂質多量 含有되었다.

皇福寺址 出土 鴟尾(15)表面 一部白色으로 酸化綠釉觀察된다. 胎土에는 一部 砂粒含有되었으나 精選된 편이며 붉은색을 띤다. 鴟尾의 몸체에는 楕圓形寶珠를 넣었던 홈이 파여져 있고, 양쪽에는 긴 縱帶를 넣었다. 鴟尾片背面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 손으로 누른 자국과 함께 흙을 補强痕迹이 남아있다. 寶珠形縱帶 모양 등을 통해서 볼 때 製作時期8世紀前半 頃으로 推定할 수 있다. 비록 小形鴟尾片이지만 表面에 남아 있는 綠釉 그리고 裝飾痕迹 등에서 王室後援으로 建立皇福寺 金堂의 찬란함을 斟酌케 해준다.

佛國寺講堂址에서 出土綠釉奏樂天人像塼(16)胎土가 비교적 緻密하며 低溫에서 燒成되어 硬度는 약하다. 얇게 施釉되어 있는 釉藥剝落이 심하다. 奏樂天人像은 목이 굽은 唐琵琶를 켜고 있는데, 왼손에는 도구인 鮮明하게 보인다. 이러한 奏樂天人像敦煌 莫高窟 第220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日本의 쇼쇼인[正倉院]同一形態實物保管되어 있다. 綠釉塼釉藥의 색깔, 天衣 자락의 유려함과 더불어 人物描寫 등으로 보아 8世紀中葉9世紀中葉製作되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法光寺址 出土 바닥전은 표면의 색이 안압지 등에서 출토하는 녹유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보인다. 법광사지 출토 전돌은 유약 두께가 매우 얇고 색조도 綠色(17)淡黃色(18)을 이룬다. 또한 이 전돌은 표면의 硬度가 강하며, 비교적 정교한 물손질로 마무리 하였다. 이 전돌은 전술한 안압지등에서 출토된 녹유와 등과 비교한다면, 이질적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

 

(3) 其他

出土地 未詳綠釉瓦 가운데 菊隱寄贈品小形方形 附椽瓦(19)上下에 작은 구멍을 두었다. 이 부연와의 文樣 構圖中央蓮子配置하고, 귀에 4寶相華文配置하였다. 또한 주위에는 等間隔으로 連珠文을 두었다. 특히 표면의 硬度가 무르고 두께가 얇으며, 색깔이 푸른색을 이루어 일반적인 녹유와보다 정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側面에도 部分的으로 綠釉를 매우 얇게 施釉하고 있어서 소형 녹유제품에도 유약을 전면 시유하지 않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綠釉飛天文平瓦當(20)文樣面이 높고 表面에는 補土가 두텁게 남아있다. 表面釉藥剝落이 심해 現在 흰색부분만 남아 있다. 飛天의 볼륨감 있는 身體, 流麗天衣表現, 上下 周緣部形態, 背面接合技法 등으로 보아 8世紀 頃製作되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鬼面瓦片(21)의 경우, 表面釉藥이 심하게 剝落되어 白色을 띤다. 특히 側面에는 푸른색의 釉藥과 함께 辰砂와 동일한 색의 釉藥이 녹아 내려있다. 胎土緻密하고 硬度는 단단한 편이다.

連番

出土地

遺物名稱

遺物番號

硬度

表面色

크기(cm)

備考

1

月城

鬼面瓦

月城 94

軟質

綠色(白色)

11.5×11.5×3.5

 

2-1

 

雁鴨池

蓮花文

圓瓦當

454(10-1)

硬質

綠色

直徑 14.0

2.0

2-2

454(10-6)

綠褐色

 

 

2-3

1366

綠色

直徑 14.0

2.0 7.0

 

3

唐草文

平瓦當

455

軟質

綠色

21.0

4.0

 

4

鬼面瓦

1381

軟質

綠色

23.5×27×3.5

478 9

480 6

1765 1

1385 1

1380 2

483 8

479 22

486 2

482 10

5

1384

硬質

綠色

29.5×22×5.5

6

483(8-1)

硬質

綠色

22.5×35.5×5.5

7

1475

硬質

黑色

(側面 綠色)

22.5×39×5

8

1382

硬質

赤褐色

23.5×27×6

9

1383

硬質

黑灰色

23×26.5×5

10-1

皇龍寺

裝飾塼

39

硬質

綠色

14.5×15×5.2

 

10-2

2618(2-2)

黃色

18.5×15.5×5.9

11

興輪寺址

慶州 9561

軟質

表面 白色

(內部 一部 綠色)

13.5×8.7×4.5

 

12

四天王寺址

鬼面瓦

慶州 1746

硬質

綠色

8×12×5

側面 唐草文

13

慶州 371

硬質

綠色

10×11×5.5

 

14

感恩寺址

慶州 7983

硬質

白色

13.5×9.5×4.5

 

15

皇福寺址

鴟尾

慶州 10037

軟質

赤色

(白色 一部 附着)

16×33.5×5.5

 

16

佛國寺

奏樂天人像塼

慶州 未登錄 34

軟質

綠色

14.5×9.5×5

佛國寺 講堂址 出土

17

法光寺址

慶州 1756

硬質

綠色

27×27.5×4.5

 

18

慶州 6710(5-1)

硬質

淡黃色

27×23×5

 

19

未詳

(菊隱寄贈品)

寶相華文

附椽瓦

菊隱 214

硬質

綠色

8×8×0.7

 

20

未詳

飛天文 平瓦當

慶地 2101

硬質

白色

18.5×7×5.5

 

21

未詳

鬼面瓦

慶地 2201(3-2)

硬質

白色

5.2×5.5×3.3

側面 赤色

統一新羅綠釉瓦<2>에서처럼 表面의 색깔이 綠色뿐만 아니라 赤色黑褐色 多樣하다. 이렇게 表面 색깔이 多樣하게 나타나는 理由現在로서는 精確히 알 수 없다. 다만 黑褐色을 띠는 綠釉瓦의 경우, 大部分 表面 硬度가 단단함을 알 수 있고, 綠色을 띠는 綠釉瓦의 경우, 硬度가 약한 遺物들이 많았다. 그러나 綠釉釉藥成分, 땔감의 種類 그리고 燒成溫度 등이 색깔을 決定하는 要因이긴 하지만, 이 가운데 燒成溫度가 유약의 變化시키는데 多少 影響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綠釉瓦 出土遺蹟檢討

 

統一新羅 綠釉瓦硏究는 먼저 成分分析實施한 후, 綠釉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慶州附近에서 綠釉瓦出土遺蹟은 당시 宮闕址月城寺刹址皇龍寺 등 수 곳이 있다. 우선 宮闕址에서 綠釉瓦出土된 곳은 月城雁鴨池(東宮址)가 있으며, 雁鴨池에서 多樣種類綠釉瓦大量 出土되었다. 그러나 現在까지 당시 宮闕月城 附近에서 出土는 그리 많지 않지만, 宮闕中心으로 發掘調査進行된다면 綠釉 數量增加可能性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月城雁鴨池三國時代부터 統一新羅 末期까지 宮闕使用되었던 事實勘案한다면 綠釉瓦出土는 당연한 歸結로 보여진다. 따라서 녹유는 당시 최고 권력기관인 궁궐에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녹유가 일반 계층에 널리 사용하지는 못했고 특정 계층에만 한정하여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統一新羅時代 綠釉瓦에 관한 文獻記錄現在까지 確認된바 없다. 그러나 綠釉에 관한 記錄은 보이지 않지만, ?三國史記? 33 雜誌 第2 屋舍條唐瓦飛簷 등에 관한 規制條項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唐瓦는 어떠한 기와를 指稱하는지 精確히 알 수는 없지만, 眞骨 階層에서도 使用制限品目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聖骨 以上最上類 權力層에서만 使用하였던 貴重한 기와임이 確實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推論妥當하다면 唐瓦綠釉相互聯關性을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덧붙여 唐瓦名稱關聯하여 당시 中國과의 聯關性再考해야 할 것이다.

전술한 사항들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는 綠釉一部 品目制限되어 使用되었음이 녹유골호에서도 나타난다. 녹유골호의 경우, 綠釉使用制限的이었기 때문에 녹유 印花文骨壺出土 數量이 극히 적은 편이다. 이 경우에도 綠釉特殊機能을 가진 品目限定되어 使用된 것으로 類推된다. 따라서 當時 綠釉는 매우 귀한 物品에만 한정하여 사용하였음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필자는 ?三國史記? 33 雜誌 第2 屋舍條에 보이는 唐瓦의 명칭이 암시하듯이 中國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기와임은 확신한다. 이는 현재도 녹유 유약을 제작하기란 쉽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통일신라시대에도 유약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주인근에서 녹유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통일신라시대에도 녹유가 일반물품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추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唐瓦는 어떠한 기와를 지칭하였는지에 대해 접근해 보는 것이 실마리를 풀어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 기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唐瓦가 막새기와를 지칭하는 것과 암막새를 지칭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唐瓦가 막새기와를 瓦當으로 부르는 혼동에서 연유하였기에 가능성은 없을 것이고, 후자는 경주 인근의 북궁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암막새의 출토 수량이 여타 기와 수량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암막새가 唐瓦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물론 후자의 학설에 대해 필자는 부정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唐瓦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는 필시 유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當時 中國의 기와들과 關聯하여 綠釉瓦用途別壓軸하여 보면 瓦當, 鴟尾, 雜像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가운데 瓦當出土 數量尨大하여 綠釉瓦가 될 可能性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綠釉瓦製作過程도 까다롭지만 가장 重要한 것은 釉藥使用이다. 釉藥中國에서 輸入했기 때문에 唐瓦라는 名稱이 생긴 것이 아닐까? 釉藥이 귀하기 때문에 綠釉施釉物品은 한결같이 最上整齊된 물건들에만 制限되어 使用하였다는 事實出土遺物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朝鮮時代 靑華白瓷의 유약을 중국에서 수입하였기 때문에 귀한 物品國家規制하는 것이 記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統一新羅時代 遺蹟地 가운데 綠釉瓦出土寺刹新羅護國寺刹皇龍寺를 비롯하여 成典寺院四天王寺, 感恩寺, 興輪寺(靈廟寺), 皇福寺願刹佛國寺, 法光寺 등이 있다. 이 밖에 成典寺院으로 推定되는 寺刹로는 永興寺, 奉德寺, 奉恩寺, 崇福寺가 있다.

이 가운데 皇龍寺三國時代부터 統一新羅 初期까지 最高 權力寺刹로서 기능을 하였고, 이곳에서는 護國關聯法會, 百高座法會 등을 開催하기도 하였다. 또한 護國寺刹四天王寺, 感恩寺 등은 創建 背景國家 혹은 王室不可分關係에 있다. 四天王寺文豆婁秘法施行하여 侵入沮止시키는 道場 役割을 하였으며, 當代人들에게는 羅唐戰爭勝利로 이끈 最高精神的 歸依處였던 것이다. 四天王寺址에서 出土綠釉四天王像塼寺刹 내의 가장 重要裝飾하였던 物品으로 使用되었다. 國家的護國寺刹四天王寺 塔表面莊嚴하기 위해 使用된 이 綠釉塼彫刻뿐만 아니라 製作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던 作品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상들은 도상적으로 해석하는데 이견은 있지만, 어째든 이 상들이 녹유상임은 확실하고 탑의 부재로 사용되었다는 견해에는 일치를 보인다. 다만 이 상들의 제작장소, 탑의 사용처 등에는 아직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현재 사천왕사지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발굴결과에 따라 구조적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녹유기와가 출토된 感恩寺文武王侵入을 막기 위해 創建하였던 護國寺刹이었는데, 神文王代完工되어 文武大王願堂이 되었다. 특히 이러한 四天王寺感恩寺?三國史記? 職官志成典項目成典寺院으로 記錄되어 있어 寺格을 추론하는데 어렵지 않다.

成典寺院에 대한 최근의 연구성과는 기존에 알려진 사원들과 함께 皇福寺가 이 範疇包含된다는 새로운 發表가 나와 學界注目을 받았다. 皇福寺神文王神睦太后, 孝昭王 新羅 王族冥福을 비는 願刹이었다. 그렇다면 上記 前述綠釉瓦出土寺刹 興輪寺, 佛國寺, 法光寺 등이 남게 된다. 이 가운데 佛國寺法光寺統一新羅時代願刹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國家的 寺刹 規模認定하는데 無理는 없을 것이다. 특히 法光寺新羅王族金均貞閔哀王願刹인 점을 감안할 때, 綠釉瓦사용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녹유전돌을 이용하여 법당바닥을 장식한 예는 皇龍寺址, 四天王寺, 法光寺址 등이다. 당시 녹유전돌을 사용하여 바닥을 裝飾한 근거는 佛敎經典에서도 確認할 수 있어 統一新羅 中期 新羅社會寺刹에 정성을 기울였던 흔적을 읽을 수 있는 貴重資料가 된다. 佛說觀無量壽佛經에 보이는 사실을 통해서 법당을 유리장엄으로 장식하는 것은 최고의 예배공간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이와 같이 법당바닥을 녹유전돌로 장식할 경우, 전돌의 표면을 시유할 유약은 다량으로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아마도 본격적인 유약 개발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법광사지에서 출토한 녹유전돌은 전술한 안압지 출토 녹유와들과 비교한다면 색조, 표면시유 두께 등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전시대와는 다른 유약 성분을 사용하였거나, 아니면 다량의 녹유전돌을 제작하는데 다소 질이 떨어지는 유약을 사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천왕사출토 녹유전돌과, 부석사 법당에 사용한 녹유전돌은 유약이 두껍고, 발색이 양호하여 통일신라 중기 녹유들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인다. 이 가운데 사천왕사 녹유전돌은 전술한 법광사지 출토 녹유전돌을 비교한다면, 시유방법, 두께, 발색 등에서 확연히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통일신라 초기에는 양질의 유약을 사용하였다가 중기 이후부터 유약의 질이 저하되는 특징을 보인다.

興輪寺文獻記錄이나 其他 情況으로 보아 당시 比重 있는 寺刹確認된다. 특히 現在 興輪寺址成典寺院의 하나인 靈廟寺였을 可能性提起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推論妥當하다면 綠釉瓦出土寺刹古記錄에 보이는 成典寺院이거나 願刹 혹은 國家的으로 일정 位置에 있었던 中心 寺刹이었던 것으로 判斷된다.

 

 

. 需給匠人

 

1) 生産需給

녹유와는 800에서 저온소성 하므로 일반적인 토기, 기와들과 함께 소성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가마에서 소성실을 별도 확보하거나 아니면 녹유전용 특수 가마가 필요하다. 후자는 다량의 전돌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사찰 조영 시에는 공사인근에 가마를 별도 제작하여 전돌을 생산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왜냐하면 전돌을 제작하여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는 장거리 운반보다 오히려 소성전의 인근에서 정제된 태토를 옮겨서 소성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만약 공사인근에 가마가 조성되었다고 가정해볼 때, 공사기간 내에 제품의 납품, 인력의 관리, 공사현장에서 의견교환으로 얻어지는 합리적 현안해결점 등과 함께 여러 사항들이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녹유는 매우 저온에서 소성을 해야 하므로 가마 인근에 녹유전용 가마를 제작하여 소성하거나 혹은 가마내의 불길이 약한 곳에 소성실을 만들어 구웠다고 판단된다. 전자는 제품을 다량으로 적재하여 소성하였다기 보다 기능과 규모면에서 녹유를 전용 생산하는 소형 가마가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녹유는 소성에서 고온이 필요하지 않고, 또한 법당에 사용하는 녹유전돌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수용 물품에만 한정하여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경주인근에서 발견된 가마터는 무수히 많지만 녹유만을 전용으로 구웠던 가마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발굴 조사된 내남면 화곡리 가마터와 금장리 가마터에서 출토한 녹유토기와 녹유 기와편(녹유벼루편)이 유일하다. 따라서 녹유생산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쌓여있고, 가마터의 미확인은 녹유의 수급관계를 규명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당시 생산한 녹유는 토기를 비롯하여 다수의 기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공급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녹유 성분분석의 자료화, 유약의 구조적 분석 등을 포함한 자연과학적 접근방법이 수급관계를 해명해 줄 것이다. 피상적인 연구접근은 녹유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기보다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내남면 화곡리 가마터에서는 녹유토기와 함께 6세기 전후에 제작한 연화문와당이 함께 출토되어 녹유연구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유적지는 물천리 가마터와 함께 6세기 전후에 조업하였던 기와 및 토기의 겸업 가마로서 와전발달사를 규명하는 유적지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녹유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자료는 없고, 다만 녹유골호의 생산지가 밝혀졌을 뿐이다. 때문에 통일신라 녹유기와의 생산시설은 아직도 이해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경주 인근의 가마터 조사가 진행된다면 구조적인 분석이 가능해 질 것이다.

2) 匠人集團

한편 녹유의 발생 시기는 백제에서 녹유와가 삼국시대에 제작하였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삼국시대부터 일시적으로 녹유가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녹유는 사천왕사지 출토 신장상과 흥륜사, 영묘사 鬼面瓦 등의 형식이 新羅僧 良志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良志가 삼국부터 통일신라까지 활동한 과도기적 예술가가 아니라 신시대에 활약하여 미술양식을 개척하고 확립한 名匠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만약 良志가 조각분야에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였던 名匠僧이었다면, 사천왕사 녹유 사천왕전과 영묘사 귀면와, 안압지 녹유귀면와 등이 동일계통이거나 혹은 동일 유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석장사지 출토 塔像文塼良志에 의해 제작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므로 모두 동일 양식에 포함될 것이다. 이 가운데 석장사지 발굴에서는 녹유기와가 출토되지는 않았다. 필자는 녹유가 출토되지 않은 원인을 석장사의 낮은 寺格으로 인하여 녹유 사용이 곤란하였거나, 혹은 전탑의 부재로 사용하는 일반기와의 물품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어째든 녹유가 통일신라 초기에 갑자기 유행하는 것은 良志와 관련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변혁기의 신기술의 유입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기와에 보이는 작품에 기인하여 작가를 유추하는 해석에는 많은 위험성을 가진다. 하지만 안압지에서 출토한 녹유귀면와는 사천왕사지, 영묘사지 등에서 출토하는 귀면와들과 조각기법상 서로 친연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동일한 집단 혹은 유파에 의해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만약 전술한 推論에 무리가 없다면, 양지가 활동하는 말년에는 녹유가 크게 유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유약이 신라에서 개발되었거나, 혹은 외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후자는 唐瓦와 깊은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명은 발굴조사에 기인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統一新羅時代製作綠釉瓦에 대해 出土遺物中心으로 簡略히 살펴보았다. 統一新羅 初期에 제작된 綠釉瓦出土數量制限的이고, 또한 一般的인 기와에 사용되지 않은 特殊品目으로 確認되었다.

現在까지 出土綠釉瓦를 살펴보면, 첫째 대체로 燒成溫度가 낮기 때문에 硬度가 약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表面의 색깔도 다양함을 알 수 있었다.

둘째, 綠釉瓦最上品目이기 때문에 當時 葬送用土器(綠釉印花文骨壺)法堂의 바닥장식 혹은 裝飾하는 用途使用되었다. 이러한 事實로 볼 때, 綠釉使用된 곳은 죽음과 關聯儀禮用品, 佛敎寺刹核心的金堂 등에 使用되고 있어 當時 綠釉價値 稀少性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間接的으로 證明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綠釉出土地域月城, 雁鴨池(東宮址)와 같은 宮闕護國寺刹中心道場皇龍寺 그리고 成典寺院이었던 感恩寺, 四天王寺, 皇福寺, 興輪寺(靈廟寺) 등의 佛敎寺院에서 出土되고 있는 점이 注目된다. 또한 新羅王室願刹이었던 佛國寺, 法光寺 등에서도 出土되고 있어 綠釉瓦使用된 곳은 當時 代表的建築物에만 限定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綠釉瓦關聯直接的文獻記錄은 보이지 않지만 ?三國史記? 屋舍條에 보이는 唐瓦綠釉瓦可能性妥當性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唐瓦瓦當 혹은 암막새를 지칭한다는 견해는 聖骨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는 唐瓦가 신라 장인들이 자유스럽게 제작하는 막새기와를 두고 규제하였는지 필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하였던 막새와 암막새는 너무 방대하고 향후 많은 수량이 끊임없이 출토할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唐瓦라는 名稱意味하듯이 綠釉瓦中國()密接關聯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旣存發表良志스님의 活動關聯 見解充分理解된다.

마지막으로 慶州 隣近窯址에서는 綠釉瓦發見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800以上溫度에서 揮發해 버리는 綠釉特性 때문에 一般 기와들과 同一한 가마에서 燒成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별도 燔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삼국사기에 보이는 唐瓦는 암막새 혹은 녹유를 지칭할 가능성도 있지만, 명칭이 암시하듯이 물품의 수입과 관련성이 깊고, 특별한 규제조항을 수반함으로 녹유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本考에 다루지 못한 녹유와의 성분분석은 후일에 整理를 하고자 한다.

 

* 이 교재는 http://cafe.daum.net/SILLA 자료실’ - ‘강좌/답사자료에 올려져 있습니다.

 

MEMO

안 내

? 新羅文化同人會...

♧ ?신라문화동인회?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초등학생을 위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와 중고등학생을 위한 경주청소년박물관학교를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박물관 어린이강당과 미술관 세미나실에서 각각 운영하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우리 문화재의 바로 알고 바르게 지키기 위하여 문화유적답사를 매월 3째 일요일에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문화강좌-문화재 해설을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경주문화원 시청각실에서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신라시대에 금관, 토기, , 기와, 조각, 그림, 공예, 음악, 문학, 건축, 무용 등에 종사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남겨주신 신라문화선사님을 기리는 제전인 벌 향연의 밤을 매년 10월에 개최하고 있습니다.

회차

일 자

연 제

강 사 (당시 직함)

장 소

470

02.1.31

경주 사마소와 사론의 형성

조철제(경주고등학교 교사)

경주상공회의소

471

2.28

청동기시대의 마을

안재호(동국대학교 교수)

472

3.28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사상

김동환(국제교육교류센타)

473

4.25

인도와 네팔의 불교유적

김구석(경주남산연구소장)

474

5.30

日本 아메노히보꼬(天日槍)의 실체

남석환(재일한국사학회 부회장)

475

6.27

원효, 화해의 등불을 밝힌 만인의 스승

김상현(동국대학교 교수)

476

7.25

신라사

주보돈(경북대학교 교수)

477

8.29

한국의 방단 건축과 능지탑

신영훈(한옥문화원 원장)

478

9.26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 소고

이은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479

10.9

경주 유적발굴과 보존

조유전(문화재전문위원)

480

10.31

선사 암각화의 세계

임세권(안동대학교 교수)

481

11.28

신라의 금석문

박방용(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482

12.26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유적

나선화(이화여자대학교 교수)

483

03.1.30

중국 석굴사원의 이해-운강석굴

이정은(경북대학교 강사)

484

2.27

경주남산 석탑재의 층별 체감율에 대한 소고

최맹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경주문화원

485

3.30

포석정의 연회장설과 수리학적 고찰

최민희(신라중학교 교사)

경주상공회의소

486

4.24

토함산 석굴암의 점정과 그 배경

장충식(동국대학교 박물관장)

487

5.29

작곡가 윤이상의 생애와 예술세계

안종배(경남대나고야대 명예교수)

경주문화원

488

6.26

영남지역의 殉葬 文化

김용성(영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489

7.31

高麗時代 華嚴經 寫經 變相圖編年考察

배영일(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490

8.28

경주와 徐羅伐斯羅

이영희(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

491

9.25

朝鮮時代 胎室에 관한 소고

이덕주(성주군 향토사학가)

 

10.9

韓國 속의 國際文化因子

김병모(,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492

10.30

문학 속의 신라인, 그리고 한국인

김선학(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경주문화원

493

11.27

한국사 속의 국제전쟁

이상훈(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494

12.25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유물 해설

김홍주(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장)

495

04.1.29

신라 왕경 조사 성과와 우리의 자세

김교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496

2.26

단석산 마애상의 역사적 의의

김창호(경주대학교 교수)

497

3.25

공예와 장인

이영희(이화여자대학교 강사)

498

4.29

동리목월 문학의 새로운 조명

장윤익(,경주대학교 총장)

499

5.27

청동기 시대와 지석묘의 이해

이재열(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500

6.24

신라에 대한 정통성 부정과 그 극복

권오찬(,경주시문화원장)

경주문화원 동경관

501

7.29

경주 천군동 피막곡사지 석탑의 고찰

신용철(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

경주문화원

502

8.26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엄기표(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장)

503

9.30

한국 고대사회의 해상교류와 해양제사

유병하(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504

10.9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과 첨성대에 대한 재검토

김기흥(건국대 문과대 교수)

505

11.25

구황리 조경유적에 대하여

윤근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506

12.30

통일신라 쌍탑의 출현에 관한 새로운 견해

채무기(경주시문화원 사무국장)

507

05.1.27

한국문화의 특색

김성구(국립경주박물관장)

508

2.24

불국사 대웅전의 상징성

김태중(,경주시문화원장)

509

3.31

초원의 고고학

윤형원(국립경주문화재연구 학예실장)

510

4.28

고구려 적석총의 분제와 묘제

김용성(/신라문화유산조사단 조사연구실장)

511

6.2

신라 적석목곽묘의 기원과 전개

박광열(/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

512

6.30

남산 칠불암 사방불 단층석탑과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출현

최민희(신라중학교 교사)

513

7.28

경주지역 신라전형석탑의 발생과 전개

한정호(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사)

514

8.25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양정석(수원대학교 교수)

515

9.29

서동요의 他密只에 대하여

박진환(부산대학교 대학원)

516

10. 8

신라 제사체계에 대한 연구

최광식(고려대학교 박물관장)

경주문화원 동경관

517

11.24

신라 일통삼한의 사적 고찰

문경현(경북대학교 명예교수)

경주문화원

518

12.29

경주 서악동 신라 중고기 왕릉 연구

이근직(경주대학교 겸임교수)

519

06.1.26

酒史 α

황상주(, 동국대 박물관장)

520

2.23

삼국유사의 밀교적 해석

이범교(포스코연수원)

521

3.30

신라 금관

함순섭(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522

4.27

신라의 사자

권강미(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523

5.25

포석정

김태중(,경주문화원장)

524

6.29

2006 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학술발표회

 

 

 

경산향토사자료 훼손과 망실 실태조사

김약수(경산시)

 

 

 

사벌국관련 자료의 검토

강경모(상주시)

 

 

 

운문사사적기를 통해서 본 아리령

박윤제(청도군)

 

 

 

문경지역 석탄산업 자료수집의 의의

안태현(문경군)

 

 

 

대구경북 봉표석(연경묘를 중심으로)

채무기(경주시)

 

525

7.27

감은사지 삼층석탑

남시진(국립문화재연구소)

526

8.31

신라향가 담당층으로서의 화랑

박진환(부산대인문학연구소)

527

9.28

慶州 文宣王影殿中國 曲阜

조철제(경주고등학교 교사)

528

10.14

향토문화단체와 지역문화 발전방안 세미나

 

경주박물관 강당

 

 

기조강연

이성원(문화재청 차장)

 

 

 

주제발표

윤열수(가회박물관장)

 

 

 

주제발표

황평우(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주제발표

김윤근(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529

10.26

통일신라 녹유기와의 실체와 현황

김유식(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경주문화원

? 20022006년 문화강좌 개최 현황

? 신라문화동인회 정회원 가입안내

1) 1956년 창립한 전국 最古의 향토역사문화단체인 본회의 정회원을 모집합니다.

2) 연령, 직업, 지역에 관계없이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으로서 본회가 매월 개최하고 있는 문화강좌또는 문화유적 답사에 통산 3회 참석하신 분이면 가능하며, 가입희망 의사를 본회 사무국(749-9101, 사무국장011-9594-7162)으로 알려주시면 됩니다.

입회비 : 50,000연회비 : 120,000(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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