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사자에대하여 문화강좌.
제522회 문화강좌<文化財 解說> 敎材 2006-4 2006. 4. 27(木)
신라(新羅)의 사자(獅子)
강 사 : 권 강 미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장 소 : 경주문화원 시청각실
후 원 : 경주시․경주문화원
신라(新羅)의 사자(獅子)
權 江 美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자는 고양이과에 속하는 동물로 아프리카와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 유라시아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하였으나 현재는 아프리카와 인도 일부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사자(獅子)라는 용어는 기원전 3세기경 인도에서부터 쓰여 졌는데, 여기에는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성수(聖獸)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獅子)는 절대적인 힘과 위용, 그리고 신성함을 상징하며 고대로부터 각 나라의 미술의장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발생과 함께 사자는 부처를 호위하는 동물로 도입되어 불교미술품에서 활발히 표현된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사자가 서식하지 않았으나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법을 지키기 위한 수호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중국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수용하면서 사자는 무덤을 호위하는 수호상이 되는데 제왕 등 최고 권력층의 무덤에만 배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자상이 불상․불탑․부도 등 불교미술품에서 불법을 지키기 위한 상으로 활발히 애용된다.
◎ 사자상의 전래
1.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 이집트에서 사자는 강력한 수호자로 나타난다. 이집트인들은 사자를 제왕(파라오)의 힘과 위엄에 비유하여 사자의 몸에 제왕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상’ 을 제작하였다. 스핑크스의 대좌에는 ‘나는 묘를 지키며, 외부의 침입을 막는다’ 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어 사자가 일찍부터 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원전 2세기 경 이집트 기자의 카프라왕 상의 옥좌(玉座) 다리에도 사자가 표현되어 있어 왕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이 사자는 이러한 수호적 역할 외에 신격화되기도 하는데, 태양신 아멘․라-가 매일 아침 태양이 뜨고 지게 하는 것을 사자가 돕는다고 여겨 태양원반과 함께 묘사되기도 하며, 초승달과 함께 그려질 때는 ‘죽은 자를 재판하는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전쟁과 주술의 신인 세크메트(Sekmet)는 사자의 머리를 한 신의 전형이 되었다.
한편,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그리스에도 전해져 여성의 얼굴을 한 유익(有翼)의 사자로 표현되는데, 델피 아폴로 신전 앞에 세운 주두(柱頭)의 스핑크스는 그러한 형태의 하나이다.
서아시아에서 사자상은 네베와 니무르에서 출토된 대왕의 수렵도, 또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사자와 수소의 투쟁도 등이 대표적이며, 주로 생태 관찰에 기초한 정확한 서경적 묘사가 많은 것이 특징적이다. 자세에 있어서도 마치 사람처럼 두 다리로 서있는 모습이 많다. 이처럼 사자와 투쟁하는 장면을 많이 묘사한 것은 당시의 왕들이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자를 수렵, 정복함으로써 강한 왕의 위용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이며, 싸움에서 진 사자는 역으로 왕을 수호하는 존재가 된다.
2. 인도
인도인들은 일찍이 사자의 힘을 공경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불교 발생 이전에는 고대 여신의 힘을 상징하여 Durgā, Śakti, Umā 등의 여신의 대좌로 조형화되었다. 불교 발생 이후에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탄생하면서 석가모니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하였으며, 부처의 대좌를 사자좌(獅子座)라 칭하였다. 이는 석가모니가 모든 악마를 제압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것을, 모든 동물을 굴복시킨 ‘백수의 왕’인 사자에 비유한 것으로 본다.
인도 불교미술품에 표현된 최초의 사자상은 아쇼카 왕의 기념석주이다. 아쇼카 왕은 기원전 300년 경 인도 전역을 지배하고 불교를 만방에 알리고자 높이 10m, 직경 90cm의 사암제로 만든 석주 30개를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 이 중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기원전 300~200년 경의 사자석주가 가장 뛰어나며, 정상에 사자 네 마리가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후 석가모니의 유골을 봉안한 스투파의 사방 문에도 사자상이 배치되는데 산치의 스투파 탑문에 표현된 유익(有翼)의 사자상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양식은 우리나라 사자석탑의 기원과도 연관된다.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를 거쳐 쿠샨왕조의 카니슈카 왕대인 서기 2세기경에 이르면 인도 서북의 간다라와 북부의 마투라 지방에서 거의 동시에 불상이 제작되면서 사자는 불상대좌에 등장한다. 이후 소위 ‘사자좌(獅子座)’의 형식은 쿠샨 왕조, 굽타 왕조에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불법의 수호자로서 사자의 역할이 확립되는데, 사자상은 불법을 수호하는 의미인 사자좌 형식과 스투파의 문에 배치된 사자상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후자의 개념은 우리나라 사자석탑의 기원과도 관련이 있는데, 후에 궁전 등 다른 건조물의 입구에도 호위의 역할로서 사자상이 배치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서인도에 위치한 5~8세기경에 제작된 엘로라 석굴에도 사자상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중 힌두교굴인 제16굴 카이라사나타 사원에도 사자 조상이 있어 사자가 힌두교에서도 수호의 동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중국
중국은 한나라 때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개통된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해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 등이 중국에 전래되고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등은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한무제가 개척한 바로 그 길을 통해 사자가 유입된 것으로 본다. 『후한서(後漢書)』서역전(西域傳)에 장제(章帝) 장화원년(章和元年)과 2년(87~88)에 월지국(月支國) 및 안식국(安息國)에서 사자를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모습은 호랑이나 기린(麒麟)과 유사하나 뿔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후 중국의 사자상은 능묘조각으로서 무덤 입구에 배치되거나 황궁이나 사원 앞에 배치되어 통치자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이와 같이 사자가 한나라 때 유입된 이래, 그 조각상이 권위자의 상징물로써 제작되기 시작 하는데 당시의 조각상달은 사자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작한 듯 과장되고 비사실적인 경향이 엿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남북조시대에 특히 뚜렷하여 날개가 달린 유익형(有翼形)의 사자까지도 등장하게 된다.
익수예술(翼獸藝術)은 서아시아 지방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달되어 온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 유입되어 유익형을 기본으로 한 천록(天祿), 기린(麒麟) 등의 공상적인 영수(靈獸)들이 출현한 것으로 본다. 한편 유익수는 인간의 사후세계에서 죽은 자를 명계(冥界)로 이끌어주는 인도자의 역할과 호위자의 역할을 내포하는 것으로 본다.
남북조 시대에는 무덤을 지키는 사자상은 긴 털을 뻗치며 날개와 꼬리, 가슴이 크며 얼굴은 위로 올리고 입을 벌려 긴 혀를 내밀고 있는 형상이다. 자세는 옆에서 볼 때 ‘S’자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나 점차 경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초기의 도약하려는 자세는 점차 직립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자세로 바뀌어 가게 된다.
당대(唐代)에는 중국 능묘제도가 확립되면서, 능묘의 석수(石獸)로 남북조시대에 유행하던 기린(麒麟)이나 벽사상(辟邪像)은 사라지고 천록(天祿)이나 천마(天馬) 그리고 사자가 많이 세워진다. 아울러 석수의 자세도 가만히 서 있거나 뒷다리를 꿇어앉은 형태로 유순한 태도와 복종적 태도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당대 능묘 석수의 특징이다. 능묘의 석수상으로 정착된 사자상은 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층의 무덤 앞에만 세워지는 것이 특징이다. 당나라 능묘의 사자상은 당 고종(高宗)의 무덤인 건릉(乾陵)에서 정형화되어 이후 능묘 사자상의 양식적 기준이 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건릉의 사자상은 세 갈래의 꼬리, 작고 튼튼한 몸매, 앞발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으로 대표되는데 부분적 강조와 조형적 단순화가 특징적이다.
송․원대 이후로는 사자상의 세부표현 파악에 중점을 두어 장식적인 성향으로 변해가며, 사자로서의 위엄을 표현하기 보다는 다소 해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지키는 영수(靈獸)의 개념과는 별도로, 불교미술품에 표현된 중국의 사자상은 불상의 성립기인 선정인불좌상의 대좌에서부터 나타난다. 선정인불좌상에서는 보통 대좌의 양끝에 1쌍의 사자상이 앉아있는데, 익살스럽게 이빨과 혀를 드러낸 채 정면을 향해 앉아 있다. 비록, 사자로서의 특징은 잘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중국에 전해진 사자좌 고식(古式)의 예이다. 위진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 사자는 불상의 방형대좌의 양끝에 부조되거나, 대좌 다리 위에 환조로 또는 중앙의 본존상의 양협시를 모시는 역할을 하며 활발히 제작된다. 특히 사자가 인왕상(仁王像)과 함께 조합되어 부처 앞에서 모시는 군상의 사례는 육조시대 이후의 것이 많으며, 이 경우 수호수(守護獸)로서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밖의 사자는 석굴사원에서도 특히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용문석굴의 제3굴 빈양남동 감에 부조된 5세기경의 사자상은 결가부좌한 불상 오른쪽 하단에 표현되어 있다. 제9굴 만불동에는 왼쪽에 입을 벌린 상과 오른쪽 입을 다문 상이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5세기경의 공현석굴 제2굴에도 용문석굴과 유사한 사자상이 불상 대좌에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사자의 자연스러운 생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거나 쌍사자문을 표현한 미술품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능묘조각에서 정형화된 당풍(唐風)의 사자와는 차별성이 드러난다.
◎ 삼국시대의 사자상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우는 사자는 용맹스러운 기질과 위엄있는 자태로 인해 일찍부터 동․서양의 고대미술품에 도입되어 강력한 힘과 신성스러움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는 본래 사자가 서식하지 않았으나,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미술품에 표현된 사자상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한다.『삼국사기』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마립간조(智證麻立干條)를 보면 우산국을 정벌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인형을 이용하여 위협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권4 의해(義解), 자장정률조(慈藏定律條)는 문수보살이 사자보좌(獅子寶座) 위에 앉았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사자를 두려워하였다는 것과 불상의 사자좌(獅子座)가 도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
(입을 다문 사자는 ‘吽(陰)形’ 입을 벌린 사자는 ‘阿(陽)形’으로 이를 음양에 의한 삼라만상을 표현한 것으로도 본다.)
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불상의 대좌에 사자가 표현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뚝섬에서 출토된 부처의 사자좌이며, 이와 유사한 예가 고구려의 장천1호 무덤 예불하는 그림의 불상 대좌에도 확인된다. 이밖에 고구려에서는 평양성과 영명사 등, 궁전과 사찰을 수호하는 성격의 돌사자상이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발해의 정혜공주 무덤 앞의 돌사자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도 이른 시기부터 불상의 대좌로 사자좌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예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 부분에 다양한 동물과 함께 표현된 사자의 예가 유일하며, 이밖에 국적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삼국시대 사자좌의 예로 청원 비중리 삼존불의 대좌가 있다.
한편,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수용한 신라에는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하단에 좌우 대칭으로 표현된 암사자와 수사자가 있다.
〈표〉 삼국시대의 사자상
구분 |
작품명 |
시대 |
소재지 (原: 원소재지, 現: 현소재지) |
비고 |
고구려 |
長川1號墳 禮佛圖 사자상 |
고구려(5세기) |
중국 집안시 장천1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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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銅佛臺座 사자상 |
고구려 |
原 : 평양 월일리 現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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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석사자상 |
고구려 |
原 : 평양 평양성 現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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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明寺址 석사자상 |
고구려 |
原 : 평양 영명사지 現 : 개성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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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百濟金銅大香爐 사자상 |
백제(7세기) |
原 : 부여 능산리사지 現 : 국립부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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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塔谷磨崖彫像群北面 사자상 |
신라(7세기) |
경주 남산 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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芬皇寺 摸塼石塔 동쪽 사자상 |
신라(643년경) |
경주 분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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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시대의 사자상
1. 불법의 수호
일찍이 불교에서는 사자가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백수(百獸)의 왕’이라는 관념이 도입되어 부처를 사자에 비유해 ‘인중사자(人中獅子)’라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에서는「상신사자상(上身獅子相): 상반신의 위용 단엄함이 사자와 같다」, 「사자협상(獅子頰相): 두 뺨이 사자와 같다」라고 하여 부처의 형상을 사자에 비유하고 있으며, 부처가 앉은 자리를「사자좌(獅子座)」,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부처가 용맹 정진하여 삼매에 든 것을 사자가 기운 뻗는 용맹한 자세에 비유하여 「사자분신삼매(獅子奮汛三昧)」라고 하였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비스런 동물로 인식된 사자상은 불교의 발생국인 인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왕의 석주(石柱)에 표현되기 시작하여 이후 불상의 대좌로도 사자좌(獅子座)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불교의 동점(東漸)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불법의 수호자로서 사자상이 도입되어 불상의 대좌를 비롯하여 불탑(佛塔), 부도(浮屠), 석등(石燈) 등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석조물에 적극 활용되게 된다.
○ 사자좌
불법의 수호자로서 도입된 사자상은 불상佛像의 대좌에 채용되어 다양한 형태의 사자좌獅子座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사자좌는 원래 불교의 발생국인 인도에서 먼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3세기경 중국으로 전래되고 5세기경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제작된다.
불상 대좌 하단에 2마리의 사자를 표현한 사자좌는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그 예가 드문 편이며 통일신라시대가 되어서도 백제계 유민이 제작한 연기지역의 불비상佛碑像에 그 전통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후기가 되면 화엄종華嚴宗 의 확산에 따라 화엄종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대좌에 사자가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연화장사자좌蓮華藏獅子座를 구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수보살 또한 사자를 대좌로 하는데,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석가불(釋迦佛) 또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보통 삼존형식으로 표현된다. 지혜(智慧)를 상징하며 석가의 왼쪽에 위치하는 문수보살은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에서“문수의 몸은 흰색이며, 머리 뒤에 빛[光]이 있다. 칠보(七寶)의 영락, 보관, 천의 등으로 장엄하며 사자를 타고 있다”라고 설하고 있다.
○ 사자 석탑
삼국시대에 이어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사자상은 불상 대좌뿐만 아니라 석탑, 석등, 부도 등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석조물에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 중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나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은 다른 나라에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탑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방법에 따라 탑의 기단부 등 네 모서리에 독립상을 배치하는 형식과 탑의 상층 기단부(基壇部) 역할을 하면서 탑신석(塔身石)을 받치는 사사자석탑 형식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사자상은 두 경우 모두 바깥을 향한 자세로 표현되며 불사리(佛舍利)를 외호(外護)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먼저 탑의 모서리에 독립된 사자상을 배치하는 형식은 이미 삼국시대 미륵사터 석탑의 네 모서리에 석인상(石人像)을 둔 형식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또 682년경의 감은사 동탑 집모양 사리기에서도 기단부 네 모서리에 사자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후 불국사 다보탑,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중흥산성 삼층석탑 등에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기단부 위에 사자상을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탑의 상층 기단부 모서리를 대신하여 사자상을 배치한 형식의 사사자석탑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시작으로,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 함안 주리사터 사사자석탑으로 이어진다.
○ 부도(浮屠)
부도는 선승(禪僧)의 사리(舍利)를 모시는 탑으로, 승탑(僧塔)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9세기에는 염거화상탑을 시작으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 양식이 성립되어 유행하게 된다.
사자상은 부도의 기단부 하대석에 표현되는데, 하대석(下臺石)에는 사자 외에 구름과 용 등이 배치되기도 한다. 하대석에 사자가 표현된 가장 이른 예는 통일신라시대 팔각원당형 부도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문성왕 6년(844)에 건립된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에서부터이다. 이후 사자상은 하대석의 상단이나 하단에 하나의 단을 이루며 조각되는데, 보통 8면에 1구씩 배치된다. 그러나 석남사 부도처럼 8면 중 4면에만 조각되거나 선림원터 홍각선사탑에서 처럼 1면에 2구가 배치된 사례도 있다.
한편 부도의 사자상은 불상 대좌에 표현된 사자상에 비해 다양하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 많으나, 10세기 이후로는 점차 생략되다가 사라진다.
○ 쌍사자 석등
석등은 빛을 밝혀 진리를 찾는다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조성된 조형물로, 불전(佛殿) 앞이나 옥외의 일정한 곳에 설치되어 종교 의식의 예기(禮器)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쌍사자석등은 일반형 석등의 간주석(竿柱石)에 해당하는 부분에 사자 두 마리를 마주보고 세워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한 독특한 형식이다. 이처럼 석등에 사자를 장식한 이유는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가 그 위력(威力)으로써 진리의 빛을 수호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는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등이 있으며, 청량사 석등과 같이 기단부에 사자상을 돋을새김 한 예도 있다.
2. 권위의 상징
○ 능묘의 사자
고대 사회에서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 여겨졌으며, 이러한 고대인의 내세관은 무덤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신분이 높은 계급은 사후의 길을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호위의 의미로 석인과 석수상을 세웠는데, 사자는 특히 왕 등 최고 권력층의 무덤에만 놓인 것이 특징이다.
『후한서(後漢書)』서역전(西域傳)의 기록에 의하면 장화원년(章和元年)과 2년(87~88)에 월지국(月支國) 및 안식국(安息國)으로부터 중국에 사자가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능묘의 호위(護衛) 석물(石物)로서 사자상이 등장하는데, 초기에는 사자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중국 고대 상상의 동물과 유사한 모습이다. 남북조시대가 되면 몸체가 ‘S’자형의 굴곡을 이루는 사자의 형태에 날개가 달린 유익형(有翼形)의 사자상이 제작된다. 수당대(隋唐代)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당대(唐代)의 능묘에서는 현실적인 사자의 모습에 근접한 사자상이 세워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 무녕왕릉에 석수(石獸)가 등장한다. 무녕왕릉의 석수는 정수리에 꽂힌 사슴뿔 모양의 쇠뿔, 뭉툭한 입과 코, 작은 귀, 비만한 신체, 짧은 다리, 등에 돌기된 4개의 갈기 등이 특징으로 뿔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중국의 진묘수(鎭墓獸)와 흡사하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되었고, 이와 함께 고종의 건릉乾陵에서 볼 수 있는 당나라풍의 정형화된 사자상이 신라에 들어오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사자는 성덕왕릉(736년경)을 시작으로 하여, 이후 통일신라 능묘제도의 완성을 이룬 괘릉과 흥덕왕릉에 그 예가 남아 있으며, 석인상과 더불어 왕릉을 호위하는 역할을 한다.
○ 왕성의 수호
춘양교(春陽橋(일정교日精橋))와 월정교(月精橋)는 760년경에 조성된 왕경(王京)지구의 다리로 현재는 그 터만이 남아 있지만, 『삼국사기』경덕왕조(景德王條)에 ‘19년 2월 (중략) 궁의 남쪽 천문상에 춘양․월정 두 다리를 놓았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두 다리 앞에는 상단에 사자상을 안치한 높은 화표석(華表石)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화표석은 신성한 구역을 표시하는 의미로 세우는 것인데 위에 사자상을 장엄하여 왕성(王城)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자상은 이후 고대 동아시아에서 궁궐의 아문(衙門)이나 대문에 배치되는 것이 통례로 되며 군주의 위엄을 한층 더하고 있다. 이 경우 사자는 암․수 1쌍으로 다르게 표현하는데 보통 오른쪽은 수사자를 왼쪽은 암사자를 배치한다.
3. 생활의 의장
○ 공예품의 사자
통일신라시대 불교공예품 속에 등장하는 사자는 대부분 불[火]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향로에 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쌍사자석등에서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던 사자와 같은 역할로, 백수의 왕인 사자가 진리의 빛을 수호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에서 발견된 사자추(獅子錘)는 사자문양이 생활 속의 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역의 영향을 받아 나무 아래에 두 마리 동물이 마주보고 있는 소위 수하쌍수문(樹下雙獸文) 형식으로 사자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 사자무늬 수막새
통일신라의 기와 가운데 수막새와 타원막새, 그리고 마루수막새에 사자문이 표현된 것이 있다. 사자는 입상(立像)과 좌상(坐像)으로 구분되는데, 좌상이 수량도 많고 형식적인 변화도 다양하다. 그런데 입상은 태백 본적사터(本寂寺址)에서 출토된 사자무늬막새를 제외하고는 모두 날개가 달린 유익형(有翼型)이어서 서역과의 문화적 교류를 짐작케 한다.
좌상의 사자는 수막새와 타원막새, 그리고 마루수막새에 장식되었는데 형식이 서로 유사하다. 수막새에 표현된 사자를 보면 막새 중심에 사자가 정좌하고 있고, 사자주위로 구슬무늬와 정교한 보상화무늬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가장자리 에는 밀집된 꽃술대가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사자는 머리 뒤에 무성한 갈기를 세우고, 뒷발을 구부린 상태에서 앞발을 내뻗고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건물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인다. 9세기 이후가 되면 좌상의 사자는 탄력을 점차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외측에 장식된 보상화의 자엽이 판육상(瓣肉狀)으로, 그리고 주문권이 원권(圓圈)으로 바뀌면서 주연부에 꽃술대신에 주문이 장식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좌상의 사자가 배치된 타원막새와 마루수막새는 몇 예에 불과하지만 지붕을 잇는 건축부재로서 의미가 크다. 타원막새는 건물의 회첨골에 사용되는 기와로 사자가 막새의 중심에 정좌하고 있고, 좌측과 우측의 공간에는 4엽의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좌상의 사자가 배치된 마루수막새 또한 수막새의 사자상과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마루수막새는 각 마루 끝에 사용된 장식기와인데, 건물을 수호하는 상징성과 함께 건물의 위용과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남아있는 입상의 사자는 모두 두 점으로 수막새에 있는데, 날개가 없는 사자와 날개가 있는 유익형의 사자로 구분된다. 날개가 없는 사자는 태백 본적사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얼굴과 몸체가 과장되게 표현된 둔중한 모습이다. 그러나 사자는 사실적인 모습으로 무섭게 표현되었고, 좁고 낮은 가장자리에는 구슬무늬를 빼곡히 새기고 있다. 유익형의 사자는 구름 위에 두 날개를 펼친 채 비상하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데, 가장자리에는 변형된 구름무늬와 구슬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사자에 날개가 달린 이같은 의장은 서역과의 교류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이 교재는 http://cafe.daum.net/SILLA 의 ‘자료실’ - ‘강좌/답사자료’에 올려져 있습니다.
안 내
? 新羅文化同人會는 ...
♧ ?신라문화동인회?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초·중·고등학생을 위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와 「경주청소년박물관학교」를 매주 토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박물관 강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우리 문화재의 바로 알고 바르게 지키기 위하여 「문화유적답사」를 매월 3째 일요일에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문화강좌-문화재 해설의 밤」을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 ?신라문화동인회?는 신라시대에 금관, 토기, 종, 기와, 조각, 그림, 음악, 문학, 건축, 춤 등에 종사하여 찬란한 민족문화를 남겨주신 신라문화선사님을 기리는 제전인 「벌 향연의 밤」을 매년 10월 10일 전후에 개최하고 있습니다.
회차 |
일 자 |
연 제 |
강 사 (당시 직함) |
장 소 |
470 |
02.1.31 |
경주 사마소와 사론의 형성 |
조철제(경주고등학교 교사) |
경주상공회의소 |
471 |
2.28 |
청동기시대의 마을 |
안재호(동국대학교 교수) |
〃 |
472 |
3.28 |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사상 |
김동환(국제교육교류센타) |
〃 |
473 |
4.25 |
인도와 네팔의 불교유적 |
김구석(경주남산연구소장) |
〃 |
474 |
5.30 |
日本 아메노히보꼬(天日槍)의 실체 |
남석환(재일한국사학회 부회장) |
〃 |
475 |
6.27 |
원효, 화해의 등불을 밝힌 만인의 스승 |
김상현(동국대학교 교수) |
〃 |
476 |
7.25 |
신라사 |
주보돈(경북대학교 교수) |
〃 |
477 |
8.29 |
한국의 방단 건축과 능지탑 |
신영훈(한옥문화원 원장) |
〃 |
478 |
9.26 |
신라 왕경의 도시계획 소고 |
이은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 |
479 |
10.9 |
경주 유적발굴과 보존 |
조유전(문화재전문위원) |
〃 |
480 |
10.31 |
선사 암각화의 세계 |
임세권(안동대학교 교수) |
〃 |
481 |
11.28 |
신라의 금석문 |
박방용(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
〃 |
482 |
12.26 |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유적 |
나선화(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 |
483 |
03.1.30 |
중국 석굴사원의 이해-운강석굴 |
이정은(경북대학교 강사) |
〃 |
484 |
2.27 |
경주남산 석탑재의 층별 체감율에 대한 소고 |
최맹식(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경주문화원 |
485 |
3.30 |
포석정의 연회장설과 수리학적 고찰 |
최민희(신라중학교 교사) |
경주상공회의소 |
486 |
4.24 |
토함산 석굴암의 점정과 그 배경 |
장충식(동국대학교 박물관장) |
〃 |
487 |
5.29 |
작곡가 윤이상의 생애와 예술세계 |
안종배(경남대․나고야대 명예교수) |
경주문화원 |
488 |
6.26 |
영남지역의 殉葬 文化 |
김용성(영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 |
489 |
7.31 |
高麗時代 華嚴經 寫經 變相圖의 編年考察 |
배영일(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
〃 |
490 |
8.28 |
경주와 徐羅伐과 斯羅 |
이영희(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 |
〃 |
491 |
9.25 |
朝鮮時代 胎室에 관한 소고 |
이덕주(성주군 향토사학가) |
〃 |
|
10.9 |
韓國 속의 國際文化因子 |
김병모(전,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
〃 |
492 |
10.30 |
문학 속의 신라인, 그리고 한국인 |
김선학(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
경주문화원 |
493 |
11.27 |
한국사 속의 국제전쟁 |
이상훈(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 |
494 |
12.25 |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유물 해설 |
김홍주(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장) |
〃 |
495 |
1.29 |
신라 왕경 조사 성과와 우리의 자세 |
김교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 |
496 |
2.26 |
단석산 마애상의 역사적 의의 |
김창호(경주대학교 교수) |
〃 |
497 |
3.25 |
공예와 장인 |
이영희(이화여자대학교 강사) |
〃 |
498 |
4.29 |
동리․목월 문학의 새로운 조명 |
장윤익(전,경주대학교 총장) |
〃 |
499 |
5.27 |
청동기 시대와 지석묘의 이해 |
이재열(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 |
500 |
6.24 |
신라에 대한 정통성 부정과 그 극복 |
권오찬(전,경주시문화원장) |
경주문화원 동경관 |
501 |
7.29 |
경주 천군동 피막곡사지 석탑의 고찰 |
신용철(통도사 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 |
경주문화원 |
502 |
8.26 |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
엄기표(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장) |
〃 |
503 |
9.30 |
한국 고대사회의 해상교류와 해양제사 |
유병하(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
〃 |
504 |
10.9 |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과 첨성대에 대한 재검토 |
김기흥(건국대 문과대 교수) |
〃 |
505 |
11.25 |
구황리 조경유적에 대하여 |
윤근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
〃 |
506 |
12.30 |
통일신라 쌍탑의 출현에 관한 새로운 견해 |
채무기(경주시문화원 사무국장) |
〃 |
507 |
05.1.27 |
한국문화의 특색 |
김성구(국립경주박물관장) |
〃 |
508 |
2.24 |
불국사 대웅전의 상징성 |
김태중(전,경주시문화원장) |
〃 |
509 |
3.31 |
초원의 고고학 |
윤형원(국립경주문화재연구 학예실장) |
〃 |
510 |
4.28 |
고구려 적석총의 분제와 묘제 |
김용성(재/신라문화유산조사단 조사연구실장) |
〃 |
511 |
6.2 |
신라 적석목곽묘의 기원과 전개 |
박광열(재/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 |
〃 |
512 |
6.30 |
남산 칠불암 사방불 단층석탑과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출현 |
최민희(신라중학교 교사) |
〃 |
513 |
7.28 |
경주지역 신라전형석탑의 발생과 전개 |
한정호(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사) |
〃 |
514 |
8.25 |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 |
양정석(수원대학교 교수) |
〃 |
515 |
9.29 |
서동요의 他密只에 대하여 |
박진환(부산대학교 대학원) |
〃 |
516 |
10. 8 |
신라 제사체계에 대한 연구 |
최광식(고려대학교 박물관장) |
경주문화원 동경관 |
517 |
11.24 |
신라 일통삼한의 사적 고찰 |
문경현(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경주문화원 |
518 |
12.29 |
경주 서악동 신라 중고기 왕릉 연구 |
이근직(경주대학교 겸임교수) |
〃 |
519 |
06.1.26 |
주사 + 알파 |
황상주(동국대학교 교수) |
〃 |
520 |
2.23 |
삼국유사의 밀교적 해석 |
이범교(전,포스코연수원 교수) |
〃 |
521 |
3.30 |
신라의 금관 |
함순섭(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
〃 |
522 |
4.27 |
신라의 사자 |
권강미(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 |